최용신과 상록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젊음을 던졌던 최용신

우리는 삼천리 반도가 금수강산이 되도록 온 몸을 바쳐 일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최용신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최용신 선생 연보
1909년 8월 12일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崔昌熙씨 2남 3녀 중 차녀로 출생
두남리는 동해 바다가 보이고 원산읍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마을로 일찍 기독교가 들어왔음.
1918년 3월 20일 (9세) 두남학교 입학 1920년 4월
(11세) 元山 樓氏女子普通學校로 전학 1924년 3월
(15세) 원산 루씨여자보통학교 졸업 1924년 4월
(15세) 元山 樓氏女子高等普通學校 입학 1925년
(16세) 한동네 건너 살고 교회 회장이던 김학준군과 약혼 1928년 3월
(19세)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 학교 최우등 졸업.
선교사 루씨 컨닝킴(Lucy Cuinggim)의 이름을 따 세워진 우리나라 5대 여자 사립(배화,이화,호수돈,숭의여고)중의 하나 1928년 4월(19세) 서울 여자협성신학교 입학(현 감신대).
1929년 (1학년)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 농촌 실습 1930년
(2학년) 강원도(경상도란 주장도 있음) 포항 옥마동 농촌 실습 1931년 10월
(22세)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현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에 옴
1931년 10월 11일 샘골 예배당을 빌려 한글, 역사, 산술, 초보의 재봉, 수예 가사, 노래공부, 성경공부 등 시작.
1932년 5월 샘골 학술 강습소 창설인가 받음
1932년 7월 경성 YWCA회관에서(제10회 Y전국대회) 샘골활동 보고
1932년 8월 학원건축 발기회 조직. (샘골부인 친목계, 염석주 등 지역 유지, YWCA 재정후원)
1932년 10월 강습소 짓는 계기 마련을 위해 추석놀이 개최
1932년 10월 강습소 정초식 거행
1933년 1월 15일 2개월여 만에 강습소 낙성식
1933년 7월 13일 수원경찰서 호출. (기록은 없으나 주재소, 경찰서로 자주 호출돼 고문 등의 심한 고통을 당했다고 생존 지인들 증언)
1933년 10월 5일 학부형, 지역유지들이 참석한 운동회 개최
1933년 10월 YWCA의 재정 후원 절반으로 삭감1934년 3월
(25세) 일본 유학,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 입학.
"이 땅을 농촌 운동의 도화선으로 만들자면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함. 덴마크 그룬트비, 약혼자 김학준을 만남.
1934년 7월 고베신학교 학내잡지인 푸른 하늘에 나의 소감 기고
1934년 9월 각기병의 악화로 6개월 만에 귀국
1934년 YWCA의 재정 후원 완전히 끊김
1934년 10월 30일 '여론' 잡지에 도움을 호소하는 '농민의 하소연' 기고
1935년 1월 장중첩증으로 수원도립 병원 입원
1935년 1월 23일 0시 20분 운명(26세, 만 25년 6개월)
1935년 6월 최용신선생을 모델로 한 沈薰의 소설. 常綠樹(여주인공 채영신으로)발표
1936년 YWCA는 비석을 세워 Y정신의 실천자, 농촌사업가의 산 표본으로서의 최용신선생을 기리고 선생의 사업과 정신을 계속하기로 총회에서 결정.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상록수 저자 심훈 서울대병원에서 36세의 일기로 운명(병명 장티프스)
1939년 8월 유달영(전 서울대 교수)의 최 용신 소전(성서 조선사)발간
1944년 최용신선생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염석주(49세로) 순국
1951년 샘골 강습소 폭격으로 파괴
1960년 샘골고등농민학원(초대원장 홍천유 장로) 개원
1962년 5월 1회 졸업생 배출 및 약혼자였던 김학준 교수 학원 이사장으로 추대
19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 제정
1974년 11월 최용신 기념비 제막
1975년 3월 11일 3월 11일 약혼자 김학준교수 타계
1976년 루씨 상록 회관 준공( 최직순 동문 등 루씨동창회 기금 모금)
1990년 경기도 안산시 최용신봉사상 제정
1991년 11월 2일 안산시 최용신묘 향토유적 18호 지정
1993년 8월 24일 안산시 상록수공원(4064평) 향토보호구역 지정고시
1994년 11월28일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추서 청원(지역신문 金明玉記者)
1995년 8월 15일 국가독립유공자(建國勳章 愛族章) 추서
2001년 2월 문화관광부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
2001년 2월 20일 감리교신학대학교 명예졸업장 수여
2005년 1월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2005년 3월 안산시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젊음을 던졌던 최용신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한 나이 어린 처녀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할 일 많은 이 강산에 자신의 젊음을 던졌던 최용신,
그녀는 밤낮으로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가르치는 교사였고, 교회의 양떼를 돌보는 전도사였으며, 팔을 걷어 부치고 논과 밭에 뛰어들어간 농민이었다.

그녀는 소설가 심훈에게 크나 큰 감동을 주어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인물이 바로 그였다. 우리는 삼천리 반도가 금수강산이 되도록 온 몸을 바쳐 일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최용신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이하 본 글은 2001년 YWCA주관 전국대학생 여성포럼에서 양 미강 목사 발표한 내용을 편집한 것임)

시대적 배경

한국 근대 역사의 과제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과 동시에 근대 문명사회를 수립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과제, 즉 자주독립과 근대문명의 양 축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 결코 떼어서 설명할 수 없다.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전파되면서 기독교는 근대문명을 이룩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음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통해 교육과 의료 등 근대화된 서구의 새로운 문화를 소개하는데 앞장섰으며, 교육을 통해 한국인들이 근대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이를 기초로 하여 한국사회의 사회개혁의 틀을 제시하였다.

기독교는 항일세력으로의 면모를 1919년 3.1운동시에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3.1운동 이후 무력투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축소되자, 민족독립의 방향을 무력투쟁보다는 근대문명을 통한 자주독립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당시 기독교운동을 전개했던 지식인들은 시대적 과제를 이중적으로 이해했다. 정치적 독립 못지 않게 근대적 문명의 발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파악했다. 또 교회라는 좁은 종교적 영역에 활동영역을 국한하지 않고, 개인적인 구원의 차원을 넘어서 민족구원, 사회구원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역에서 민족실력양성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민족실력 양성운동은 주로 농촌에 집중되어 전개되었는데, 한국민의 80%가 농촌인구였다는 사실을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전개되었던 운동이 주로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반기독교운동 등 외부적인 요인과 더불어 농촌의 피폐로 더 이상 교회의 부흥이 되지 않는 내부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농촌운동으로 그 운동의 축이 옮겨갔다.

농촌경제를 살리고 부흥시키는 일이 농민들을 교육하는 일과 병행되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슬로건이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는 것은 나만이 잘 먹고 잘 살자는 의미가 아니다. 개인의 실력양성이 곧 민족의 실력양성이고, 이것은 정치적 독립 못지 않게 이 민족을 살려내는 일이라고 믿었다.

최용신의 농촌운동 역시, 민족실력 양성론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는 이미 대세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운동의 민족운동의 성격을 담고 있다. 1930년대 기독교의 민족운동이 농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민족실력 양성의 전제조건인 교육운동의 성격에 비추어볼 때,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이 분리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농촌운동가의 탄생

최용신은 1909년 8월 함경남도 현면 두남리에서 최창희씨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두남리는 원산읍에서 10리 사이에 위치한 동해의 푸른 물결이 있고 유명한 명사십리의 푸른 솔과 흰 모래, 그리고 붉게 핀 해당화가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또 이곳은 원산보다도 기독교가 일찍 전파되어 사립학교가 만들어진 곳이었다.

최용신의 가정은 경주 최씨 문중으로 정치적 격변으로 희생되어 원산으로 귀양와 계속 살아왔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 지방의 유지로,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통해 이 민족을 일으키려고 했던 교육운동가였다. 가정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가정환경은 언제나 빈궁한 삶을 살도록 했다. 4년 동안 점심을 먹지 못할 정도로 빈궁한 삶의 연속, 그에게 있어 가난은 삶 자체였다. 당시 피폐한 농촌의 고단한 삶에서 최용신은 예외가 아니었고, 앞으로 그의 삶을 농촌으로 이끌게 한 요인이 된다.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최용신은 열 살이 되자, 고향인 두남 학교에서 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기 위해 선교사가 운영하던 루씨여학교로 전학하였다. 루씨여학교는 원산에서 여성교육을 전담하여 많은 여성지도자를 배출한 미션스쿨로, 최용신은 이곳에서 신앙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전희균 목사이다. 그는 루씨여학교에서 20년 동안 성경을 가르치고 최용신에게는 거의 10년 동안 직간접적으로 신앙의 지도를 해준 사람이다. 이곳에서 최용신은 예외없이 성경시험에 만점을 받았다. 가난했던 경제사정으로 점심을 굶기도 했으며, 때로는 학기금을 내지 못해 도서관에서 일자리를 얻어 공부를 하면서도 학교에서 늘 수석을 하면서 1928년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어려운 경제생활 속에서도 최용신은 늘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고, 늘 성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키워나갔다. 그는 루씨 여학교에서 인생의 목표를 찾았다.

그는 졸업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서울이나 평양과 같은 대도시가 아닌, 지방도시 함경남도에서 교육받은 여학생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1930년대에 루씨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최용신은 분명 엘리트 여성이었다. 지식과 신앙을 겸비한 그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였을 것이다. 그의 고민은 농촌운동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루씨여학교를 졸업하면서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하면서 그는 농촌운동이 그의 사명임을 말하였다고 한다. 이미 루씨여학교 시절 농촌운동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교문을 떠나 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것은 이 사회가 부족한 점과 결함된 곳이 많은 까닭이다.
이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며 또 누구를 찾는가? 사회는 새 교육을 받은 새 일꾼을 요구한다. 더욱이 현대는 중등교육을 받고 나오는 여성을 가장 요구하는 줄 안다... 예로부터 우리 조선여성들은 5천 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사회의 대세는 고사하고 자기들의 개성조차 망각하고 말았다. 이로 보아 남녀 양성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남성만의 활동과 노력만으로써 원만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여기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자진하여 자기들의 책임의 분을 지고 분투한다면 비로소 완전한 사회가 건설될 줄로 믿는다... 이제 그 활동의 첫 계단은 무엇보다 농촌여성의 지도라고 믿는다. 나는 농촌에서 자란고로 현 농촌의 상황을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절실히 느끼는 바는 농촌의 발전도 여성의 분투에 있다는 점이다... 농촌여성의 향
상은 우리들의 책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한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
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을 달
려가자” 이 글에서 최용신의 시대인식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시대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
하게 꿰뚫어 보았다.
최용신에게 있어서 이 시대의 화두는 농촌이었다. 최용신은 왜 농촌을 평생의 활동지역으로 삼았
을까? 일제의 식민지가 된 한국은 두 가지 시대적 과제, 즉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독립이었다.
1919년 3.1운동을 겪으면서 직접적인 무장독립운동을 하기 어려운 시대적인 한계 속에서 경제적
자립운동을 통해서 민족운동을 이끌겠다는 의지들이 집합된 것이다.
샘골을 기반으로

1928년 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최용신은 매우 중요한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그 만남은 바로 아닌 황에스더와의 만남이다. 황에스더는 여성비밀결사체의 모체인 ‘송죽회’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이 당시 협성신학교의 농촌사업 지도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황에스더는 농촌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YMCA, YWCA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학생들에게 농촌운동에 대한 사명감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최용신은 협성신학교를 다니면서 황에스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입학한 첫 해, 황해도 수안 용현리로 황에스더와 김노득과 함께 농촌실습을 떠났다. 각종 식용품과 일용품을 가지고
긴 여행 끝에 용현리에 도착해보니 문맹과 극빈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과 함께 3개월 동안 최용
신을 비롯한 세 처녀들은 글을 가르치고 학예회를 열면서 동고동락했다. 이곳에서 최용신은 관념적으로 생각만했던
농촌운동을 실제적으로 실습하고 농촌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체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다음해
포항 옥마동에서의 농촌실습은 자신의 전 생애를 농촌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게 하였다.

졸업을 앞둔 1931년 10월, 최용신은 당시 수원지방의 밀러 여선교사의 요청과 YWCA의 지원으로 경기도 반월군 천곡
(샘골)에 파송을 받아가게 된다. 이미 천곡은 교회가 세워져 부흥일로에 있었으며 선임자인 장명덕 전도사에 의해
학원도 설립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로 일하는 여건이 좋은 천곡에서 최용신은 마을을 순회하면서 농민들의 생활상태
와 교육에 대한 열의를 타진하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교육사업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막상 마을을 다니면서 학원의 신입생을 모집해보니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사람들이 일찍
기독교를 믿어 생각은 많이 깨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파란 처녀의 교육사업에 전적으로 밀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최용신은 만나는 사람마다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하고 권면하면, 마을사람들은 “돈이 없어요, 월사금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실망치 않고 최용신은 “공부해서 잘살아 봅시다”하면서 학생들을 모집한 결과 40명이 되었다. 이들에게 한글, 산수, 재봉, 성서 등을 가르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육하는 것에 전념하였다. 저녁에는 부녀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쳤다. 그는 하루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오전반이 끝나면, 곧 오후반을 가르치고, 이것이 끝나면 가정순회지도, 개인전도로 다니며, 밤에는 다시 야학을 인도하였다. 야학이 끝나면 한밤중에 그 동안 미처 돌아보지 못한 동네를 지도하고 오면 첫 새벽이 되는 것이었다. 최용신의 이러한 열심과 헌신적 행동은 마을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헌신으로 인해, 최용신과 샘골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샘골의 모든 일은 최용신의 한마디로 주저없이 움직이게 되었고, 샘골의 어려운 모든 일은 최용신에게로 왔다. 닭을 잡아도,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와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대접했다. 완전한 신뢰였다. 점차 천곡학원이 마을사람들의 신임을 얻었고 학생수는 증가하여 6칸의 예배당이 비좁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학원을 인가하여 강습소로 개축할 계획을 세워 추진하였다.

정식 학원 설립의 꿈을 키우던 최 용신은 교회를 중심으로 “천곡 학술학원 건축발기회”를 조직하였다. 최용신은 동네 유지들을 찾아 다니면서 “짐승을 키우는 것보다는 사람을 키우는 일이 더 소중하지 않느냐”며 설득 작업을 벌여 기금을 모아갔다. 그녀는 기금을 모음과 동시에 건축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나서서 돌을 나르고 새끼를 꼬고 터를 닦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일치 단결하여 학교를 세워 나간지 한달 남짓한 1932년 10월 27일 정초식을 거행하였고, 추운 겨울에도 쉬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여 드디어 1933년 1월 15일 낙성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러 천곡학원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933년 봄이 되어 학생을 새로 모집하니, 예년보다 훨씬 많은 110명이나 몰려오게 되었다. 새로
지은 교사마저도 턱없이 모자랄 정도였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은 반드시 예배로부터
시작하여 보통 6시간 또는 7시간 계속되었다. 보통학교 6년 과정을 단 2년 만에 마치는 것이라
조금은 벅찬 과정이었다. 그러나 보통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전부 다 가르쳤는데, 특히 그
녀는 한글, 역사, 성경 등의 과목에 중점을 두고 가르쳤다. 그녀는 이러한 과목을 통해서 신앙
과 애국심을 고취시켜주기 위해서 최선을 노력을 다하여 나간 것이다. 예를 들어, 동화시간에
는 모세, 다윗, 에스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자수시간에는 한국지도를 무궁화 꽃으로 꾸미
게끔 하였고, “무궁화 이 동산에 역사 반만년”이라는 노래를 가르침으로써 민족교육과 아울러
민족신앙을 심어나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천곡학원은 점점 일제의 미움을 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최용신은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고서 민족신앙의 민족교육을 계속해나가자, 급기야 일제는 갖은 탄압을 가해오기 시작
하였다. 학생수가 시설에 비해서 너무 많으므로 초과 학생을 돌려보내라느니, 조선의 국어와 역사는 가르치지 말라느니 하면서 갖은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다. 학원의 시설미비라는 명목으로 천곡학원의 학생들을 다른 곳으로 빼내는 등 분열정책을 일삼았다. 일제는 사사건건 천곡학원을 운영하는 최용신을 불러댔다. 최용신이 기독교인이며 신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는 점, 역사와 한글,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점 등은 일제가 긴장하는 점이었다. 일제는 3.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 열기를 이미 경험한 터였다.
결국 일제의 조치를 따르지 않으면 학원이 폐쇄 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봉착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설움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떠나지 않겠다는 아이들을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떠나 보내며 해가 지도록 아이들과 대성통곡을 하여야 했고, 일경이 오지 않을까 눈치를 봐가며 우리의 말과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 설움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이런 모진 탄압을 견뎌내기 위해 오히려 자신에게 더욱 채찍질을 해 나갔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쉴새 없이 가르치노라면 목이 부어오르고 팔다리가 쑤셔대지만, 밤이면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부녀자들을 위한 야학에 서곤 하였다. 또 농번기 때마다 손수 마을 사람들의 논밭일을 돕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학이라 해서 쉴 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천곡을 중심으로 해서 이웃에 흩어진 마을과 교회를 찾아다니며 단기 교육을 시키곤 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힘은 그녀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오는 힘이었으며, 교육을 통해서 민족을 일으키고자 한 그녀의 민족신앙에서 온 것이 분명할 것이다.

고베 신학교 유학

1934년 3월 최용신은 좀더 신학적인 이론 수업을 쌓기 위해서 일본의 고베여자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은 자신의 오빠와 동생이 공부하고 있었고 어린 시절 부모에 의해 정혼했던 약혼자, 김학준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가 수학했던 고베 여자신학교(현 세화대학교) 자치회 기록부(1934년 4월 27일)는 당시의 최용신의 심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저는 조선에서 신학교를 다니다가 사명감에 불타 농촌전도에 들어갔는데,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다시 학교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들어오고 보니 그 희망이 이루어져 현재 대단히 기쁩니다.”
(“최용신 양의 신앙과 사업”의 저자 홍석창 목사가 84년 도일해서 확인)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3년간이나 중단했던 신학공부를 그것도 이국땅 이국인 사이에서 쫓아가고자 너무 무리해서 공부했던지 덜컥 병이 나고 만 것이다. 처음엔 다리가 붓고 몸이 조금 피곤한 정도였으나 차츰 그 부기가 더해갔고 나중엔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 아마 그것은 3년간의 힘들고 고된 농촌사업에 지치고 지친 후유증으로 온 것일 게다. 최용신은 애써 준비해 온 유학의 길을 도중 하차해야 하는 아픔을 간직한 채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은 최용신이 공부를 도중에 하차하고 만 것이다.

다시 천곡 으로

최용신은 먼저 고향에 내려가 건강을 회복한 다음 다시 천곡으로 갈려고 생각하였으나 천곡 사람들이 “아파서 드러누워도 좋으니 제발 천곡으로 오라”고 애원하는 통에 그녀는 제 2의 고향인 천곡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이다. 천곡 사람들의 기쁨은 대단하였으며 그들은 곧 바로 그녀의 완쾌를 위한 기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누구라 할 것 없이 각자가 좋다는 약을 다 구해 드렸고, 전보다 더 알뜰히 보살펴 드렸다.

이런 정성의 손길로 인해서 그녀의 병세는 차츰 호전되어 갔다. 몸이 좀 회복되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일을 위해 다시 일어섰다. 워낙 책임감이 강하고 부지런한 성품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천곡을 위해서 전보다 더욱 열심히 뛰어 다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년 전부터 원조해 주던 YWCA의 보조가 1년 전에 절반으로 삭감되더니 1934년 10월에는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학원운영에 큰 타격을 주어 그 아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최용신은 이 절박한 상황에서 당시의 여론(女論)이라는 여성잡지에 글을 기고하여 호소하였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의 현상을 여러분 앞에 내어놓고 싶습니다. 내가 사는 이 촌은 우리 조선에
있어서 두메라고 부를 만한 벽촌은 아니외다. 서울서 멀지 않은 서해안의 작은 두메 산골짝이랍
니다. 이 촌을 가리켜 근방에서는 교촌(敎村)이라 부르니 이 까닭은 이곳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20여 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영향으로 인하여 학습강습소가 마을 가운데에 제일 높은 곳에
있는데 그래서 이 촌을 가리켜 문화촌이라고까지 부릅니다. 이 강습소에는 근방 십여 동네의 아
동이 모여 오는데 그 수가 백여 명이나 됩니다. 이 많은 아동들이나 가정 정도를 말씀하여 보면,
호수가 1,400호 되니 그 중에 1년 수입 150원 이하의 호수가 910호나 됩니다. 특히 빈한한 지방이
므로 이 강습소는 그 대중을 가르치는 데에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강습소는 이 지방의 중
요한 기관이나 우리는 이것도 우리 농민들의 손으로 독립경영을 하지 못하고 사업가들의 후원
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문화촌이라는 이름을 듣고 교촌이라는 칭호를 받는 이 촌중에 비통한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땅을 울리오니 목석이 아니고서야 어찌 볼 수 있사오리까? 이 비
통한 울음은 다름이 아니오라 우리의 불쌍한 어린이들이 배우고 가르치는 강습소가 폐쇄된다는
원통한 울음이었습니다. 사업가의 열성은 경제적 제한이 있어 이제부터는 후원의 손을 끊는다
는 소식이 들림에 우리들은 낙망의 눈물, 비통한 울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르칠 줄 알고 배울
줄도 알건마는 우리에게는 여유가 없습니다. 배움에 굶주린 우리 농촌 어린이들은 장차 어디로
가며 가르쳐 주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어이 하오리까? 우리 농민의 호소를 어찌 다 기필하오리
까? 뜻있는 이여! 우리 농촌의 아들과 딸의 눈물을 씻어 주소서.” (1934년 10월 30일)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운 호소를 했음에도 그들은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최용신은 막다른 길에서 발벗고 나섰다. 여러 친지들이며 먼 친척들을 찾아다니면서 호소하여 어려운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이런 그녀에게 또다시 시련이 닥쳐온 것이다. 다시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옛날의 증세에다 식욕까지 떨어져 음식조차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회복되리라 생각하고 약을 먹어가며 수업을 강행하였다. 그때의 사정을 천곡교회 홍찬의 장로는(88년 당시 76세) 이렇게 회상한다.

“그 와중에서도 선생님은 학원의 떨어진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운동회까지 개최하였고, 또 수업도 계속해 나가셨지요. 도저히 서서 가르칠 형편이 못되면 앉아서라도 수업을 강행하셨습니다. 보다 못해 우리들이 좀 쉬라고 권유하면, ‘배우러 온 학생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시곤 했죠.”
1934년 해가 저물어 가면서 그녀의 병은 극도로 악화되어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그녀의 병은 “장중첩증”이었다고 한다. 창자가 창자 속으로 꼬여 들어간 것이었다. 2차에 걸친 수술이 시도되었으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농성 복막염까지 겹치게 되었다. 이는 극도의 과로와 영양부족 탓인데다 치료를 미워왔기 때문이었다.

1935년 1월 22일 아침, 학원 이사 중에 한 사람인 안홍팔 씨의 손을 잡고 힘겨운 말문을 열었다.

“...만일 제가 떠난 후에라도 학원만은 잘 살려서 여러분의 손으로 훌륭한 학원을 만들어 주세
요... 제가 약혼한 지 올해가 10년이어요. 올 4월부터는 두 사람이 힘을 모아서 농촌을 위해 일
하고자 곧게 약속했지요. 그런데 이대로 떠나니 그 사람에게 대단히 미안합니다... 제가 늙으
신 어머니보다 먼저 떠난다면야 그것도 죄송한 일이고... 내가 죽은 후에는 학원이 잘 보이는
곳에 묻어주세요... 교회와 여러 이웃 친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은혜를 갚지 못하고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아무에게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세요...”
이렇게 띄엄띄엄 한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끝낸 뒤 그녀는 가끔씩 헛소리를 하기도 하였
다.가끔씩 “주여! 주여!”라고 조용히 외치기도 하였다. 1935년 1월 23일 오전 0시 20분 그녀의
얼굴에 만면의 희색이 돌더니 긴 한숨을 몰아 쉬고는 고요히 영원의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
어가고 말았다. 그녀는 그렇게 25년 6개월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었다.

장례식은 천곡 마을장으로 학원 마당에서 온 교우와 학원의 학생, 학부형 그리고 친지들이 운집한 가운데 당시 천곡교회 전재풍 목사의 주례로 장명덕 전도사의 기도, 어린 학생들의 조가 및 조사, YWCA의 대표 황에스더 여사의 조사 순으로 이어졌다. 장례식이 마칠 무렵 현해탄을 건너 급히 달려온 약혼자 김학준 씨가 도착,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다 못 다한 사랑을 나누기라도 하려는 듯 입고 온 외투를 그녀의 관 위에 고이 덮어 주위를 더욱 숙연케 하였다.
막무가내로 관에 매달려 울부짖는 어린 제자들을 겨우 뜯어말리고서야 그녀의 시신은 그녀의
사랑과 봉사와 희생이 아로새겨진 천곡학원이 마주 보이는 산, 언덕 공동묘지에 묻혀진 것이다.
최용신이 죽은지(1935년 1월 23일) 72년이 지난 오늘 2007년도의 샘골동산에는 지난 1998년에
새로 지으진 샘골(천곡)교회가 있다. 그 앞에는 두 개의 기념비가 조용히 서있는데, 하나는 루
씨 동창회와 천곡교회가 합동으로 1974년 11월에 세웠다. 이 기념비에는 유달영 작사, 이홍열
작곡의 “최용신을 기리는 노래”를 적고 있다.

“일제 하 처절하던 민족 수난기에 나라의 광복 위해 모든 것 버리고 농촌 계몽의 선구로 불사
조되어 이 고장 이 마을에 생명을 바쳤네 영원히 역사에 푸르른 얼이여 꽃다운 처녀 싱그러운
처녀 민중의 가슴속에 뿌리깊이 잡아 지금도 쉬지 않고 사랑으로 자라네.”

최용신의 정신

최용신의 정신은 오늘의 시점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1930년대와 2000년대를 이어내는 지점은 무엇인가?
청년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 신앙인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최용신 그는 짧은 생애를 온 몸을 불사르듯이 자신을 내던졌다. 그의 목숨과 맞바꾼 농촌사랑은 이 시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기독인들이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철저하게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응답했다. 1930년대가 요구한 것은 대다수 국민들을 절대적 빈곤에서 구하기 위해서 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
었던 농민들, 더 나아가 여성농민들을 교육하는 일이었다. 교육만이 민족의 미래를 만들어내는 일이며, 농촌을 살
리고 민족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일제의 식민수탈로 중요한 본질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부장적 사회체제로 인한 여성들의 고통과 고난을 간파하였다. 따라서 최용신의 과제는 농촌과 여성이 되었던 것
이다.
또 하나, 그는 목숨을 내놓은 헌신적 사랑으로 완전히 지역 속에 녹아 들었다. 샘골주민들과의 완벽한 일체감, 연대감, 신뢰감을 형성하여 지역운동의 모델을 창출하였다. 그가 만든 강습소는 교회의 지원이나 외부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주민들 한사람 한사람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사회의 고난에 참여하는 신앙인이었다. 결코 남성중심사회에 안주하며 살지 않은 여성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듯, 인간을 사랑한 기독교휴머니스트였다. 그는? 비바람과 눈보라에도 끄떡하지 않는 소나무였다.

그의 정신을 오늘의 시점에서 재해석한다면 첫째, 바닥정신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풀뿌리 중심주의의 실천이다. 최용신과 샘골은 떼어놓을래야 놓을 수 없는 완전한 혼연일체였다. 최용신은 샘골을 통해 자신의 이상과 신앙적 실천을 이루어갔으며, 샘골은 최용신을 통해 민족독립의 교육계몽운동을 구체적으로 펼쳐갈 수 있었다. 최용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닥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샘골이라는 바닥을 중심으로, 샘골주민들과 함께하는 운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농민들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최용신의 바닥운동은 오늘날 시민사회운동을 향한 지적들 - 지식인 주도운동, 현장과 무관한 운동 등 - 에 대한 모델을 제시한다. 철저한 현장중심적 사고, 현장의 요구를 품어내되 결코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한단계 승화시켜내는 풀뿌리중심의 사고와 실천이야말로 최용신 정신을 오늘에 접맥시키는 중요한 고리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최용신의 페미니스트적 실천정신이다. 최용신은 ‘여성’으로서의 삶에 안주하지 않았다. 여성이면 으레히 결혼을 해야 하고, 자식을 낳고, 남편과 가정을 꾸린다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일반화된 도식에 자신을 맞추지 않았다. 그는 당시 몇되지 않은 지식인 여성들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해나갔다. 그는 이 사회가 새교육을 받은 새일꾼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새 일꾼이란, “교육받은 여성들이 자진하여 자기들의 책임의 분을 지고 분투한다면 비로소 완전한 사회가 건설될 줄로 믿는” 그런 일꾼을 의미한다. “남성만의 활동과 노력만으로써 원만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여성의 사회참여가 필요하다고 그는 본 것이다.

여성들의 사회참여는 일반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1930년대와 2001년도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최용신의 정신에서 재해석해야 할 점은 ‘여성들이 왜 사회참여를 해야하는가’라는 사회참여의 목적이다. 나만 잘살기 위한 사회참여가 아닌, 이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사회참여이며, 이것이 여성의 몫이라는 점을 그의 정신에서 읽을 수 있다.

세 번째, 최용신의 기독교사회운동 정신이다. 최용신의 농촌운동은 철저히 신앙 위에 기초해있다. 그에게서 신앙은 교회부흥, 전도 등 개인적인 신앙에만 머물러있지 않다. 그에게서 신앙은 개인을 넘어서 이 사회를 구원하는, 이 민족을 구원하는 푯대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물질만능주의, 성장주의에 매몰되어 이웃과 사회의 문제에 동참하는 것을 게을리하고 있다. 기독교의 본래적 사명이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고, 소금을 뿌려 썩는 것을 막는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이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데 온통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민족과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한일간의 과거사문제, 해방 후 지금까지 불평등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주한미군문제 등 뿐 아니라, 환경문제, 통일문제 등 많은 산적한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1930년대 기독교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농촌계몽을 선택한 것은 기독교가 민족의 과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최용신의 농촌운동은 기독교의 민족적 과제수행의 일환이었고, 바로 기독교사회운동의 역사적 뿌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제자가 본 최용신 (조선일보 기사. 2007년 5월)

1934년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리(샘골·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가난한 시골마을의 10살 소년 석필은 공부를 무료로 가르쳐 주는 강습소가 마을에 생겼다는 소식
을 듣고 호기심 어린 발걸음을 뗐다. 그리곤 그곳에서 평생의 스승이 될 ‘그분’을 만났다. 소설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을 마음속 ‘상록수’로 여기며 성장한 소년은 이제 백발노인이 되었지만, 스승의 큰 자취
를 기리는 ‘최용신 기념관’ 건립에 물심양면으로 온 힘을 보태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 속 허
구로만 여겨온 ‘청석골 강습소’(실제 이름은 ‘샘골 강습소’)의 산증인인 홍석필(83·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씨다.

지난달 26일 만난 홍씨는 “선생님은 평생 내 인생의 좌표이자 삶의 원동력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지난 2004년 최용신 기념관이 건립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지고 있던 건물과 땅을 팔아 선
뜻 1억 5000만원을 내놓았다. 현재 공사가 한창인 기념관은 오는 9월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상록수공원 내에 문을 열 예정이다. 지상 1층, 지하 1층의 기념관에는 선생의 유품과 사진 등 자료들이 전시되며 샘골 강습소도 재현된다. 요즘 관절염으로 바깥 출입을 거의 못하는 홍씨지만 집으로 찾아온 관계자들을 만나며 전시관의 고증도 돕고 있다.

“기념관 계획을 듣고는 ‘그래 이거다, 이거나 해 놓고 죽자’ 싶었어요. 선생님의 애국정신을 이어가는 게 내 평생의 꿈이었으니까요. 이제라도 선생님 기념관을 볼 수 있어 참 좋아요.” 70여년 전 아이들 앞에 선 최용신은 흰 저고리, 까만 치마, 곱게 빗은 머리에 단정히 핀을 꽂은 청순한 모습이었다고 홍씨는 회고했다. “미인이었죠. 냉철하고, 똑똑하고, 말도 조리 있게 잘했지요. 선생님 뵐 때마다 늘 내 가슴이 설랬으니까…(웃음)”

최용신은 일제의 탄압 아래 풀 죽어 있던 학생들에게 “너희들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며 격려해 주었다. 특히 그녀가 잔잔하게 풀어 놓던 ‘미래’, ‘희망’에 관한 이야기는 어린 소년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최용신과 아래윗집에 살았던 소년 홍석필은 틈만 나면 여선생님 자취방으로 놀러가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

최용신은 안타깝게도 제자 석필과 만난 이듬해인 1935년, 속병을 얻어 만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숨졌다. 그러나 어린 제자는 선생의 뜻을 간직하고, 이어갔다. 21세 때 징용당해 인천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복무했던 홍씨는, 광복이 되자 고향인 샘골로 돌아와 방앗간을 차리는 것으로 농촌 운동을 시작했다. “물방아를 이용해 발전(發電)을 했어요. 전기가 귀하던 시절이었으니, 인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전등불이 훤한 우리 샘골을 부러워했죠. 덕분에 우리 마을은 국가로부터 ‘신생활 모범부락 표창’도 받았지요.”

심훈 (1901~1936, 본성명 심대섭)
1901년 10월 23일 서울 노량진에서 부 沈相珽의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
1915년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
1917년 전주 이씨(후일 심훈이 海暎이란 이름을 지어 줌)와 결혼(1924년 이혼)
1919년 경성제일고보 4학년 재학 당시 3.1운동에 가담, 3월 5일 헌병대에 체포되어 투옥됨
1919년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남
1920년 유학의 길을 떠남. 북경,남경,상해를 거쳐 항주에 이르러 之江대학 수학
1923년 귀국, 최성일, 안석주 등과 함께 劇文會 조직
1924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
1926년 <철필구락부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직.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
<먼동이 틀 쩨>를 각색 감독 주연하여 단성사에서 개봉, 흥행에는 성공하였으나 계급의식이 결여되었다고 해서 임화 등 카프측에서 맹렬히 비판
1930년 <동방의 애인>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나 일제의 검열에 의해 중단됨.
시 <그날이 오면>을 이 해에 썼다고 함. 안정옥과 결혼
1931년 평론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 발표
1932년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낙향
1933년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검열로 출간불가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퇴출됨.
당진 본가에서 장편 <영원의 미소>를 집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
1935년 장편<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기념 현상공모에 당선, 연재됨
1936년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계획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 한성도서에서 <상록수>를 간행하려고
일하던 도중 장티프스에 걸려 대학병원에 입원
1936년 9월 16일 36세를 일기로 급서
1949년 시집<그날이 오면>이 한성도서에 간행됨
1951년 <심훈전집>전 7권이 한성도서에서 간행됨

 

필경사 가는길

필경사 : 당진군 송악면에 위치하였으며, 작가 심훈이 말년에 집필하던 곳

찾아오시는 방법
ㆍ서해안 고속도로 - 송악 IC - 한보철강 방향 대로 - 필경사 이정표
ㆍ천안 IC( 경부 고속도로) - 아산(39번국도)- 삽교호관광지(38번국도) - 송악 IC(서해안고속도로 밑) - 부곡.고대국가공단(동부제강) - 한보철강 필경사 - 석문방조제- 왜목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