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골교회역사

하디선교사의 간증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리고는 부끄러움과 얼굴의 혼돈과 더불어 내 자랑과 완악한 마음, 믿음이 적음과 그리고 이런 것들에 인도되었던 많은 것들을 고백하였을 때, 그들은 처음으로 실제적 체험에 있어서 확신과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에 의해서 내가 어떻게 심령의 은사를 받ㄱ데 되었는지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지리적 배경

샘골(천곡)마을은 이름 그대로 예로부터 샘물이 잘 나고 물맛이 좋은 동네로 알려져 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부근에 대한 기록으로 조선 제19대 숙종 시대에 나온 이 중환의 택리지에 설명이 있다.

“수리산의 남으로 뻗은 지맥은 서남으로 달려 광주 성곶리(光州 聲串里)에 그치어 어염의 갯마을을 만들었다. 근해에 상선이 많이 모여들어서 백성들은 어물 파는 것으로 업을 삼아서 부유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광주 성곶리란 성포리로, 택리지가 기록된 1760년경에는 이곳을 포함하여 군포, 부곡(의왕면 일대), 반월, 팔곡리, 본오리, 사리, 일리, 이리가 광주목에 속하여 있었다. 그러다가 1906년 전국의 월경지 정리가 있어 광주군에 속했던 3개면-성곶면, 월곡면, 북방면-이 안산군으로 편입됨으로써 샘골은 안산군 성곶면 사리로 이속되었다. 당시 성곶면에는 본오리, 일리, 이리, 사리가 속해 있었다.

그 후 일제에 의해 다시 행정구역이 조정되었는데(1914년), 이 때에 안산군에 속해 있던 성곶면이 월곡면, 북방면과 함께 수원군으로 편입되었고 명칭도 3개 면의 중앙에 위치한 반월산 밑의 반월 부락명을 따서 반월면으로 변경되었다(수원군 반월면 사리).

1949년에는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하면서 수원군의 이름이 화성군으로 개칭됨에 따라서 화성군 반월면의 사리 샘골이 되었고, 1979년 설치된 반월출장소가 1986년에 안산시로 승격한 후, 분구와 분동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본오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의 광주군 성곶면 오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리가 본오리와 분오리로 나뉘어 1906년 안산군 성곶면 본오리와 분오리, 1914년 수원군 반월면 본오리가 되었다가 1986년에 안산시 본오동(安山市 本五洞)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변천사를 볼 때, 거리상으로 샘골(천곡)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안산이고 그 다음이 남양과 수원인데 왜 100여 리나 떨어진 광주목에 오랫동안 속하고 있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 후의 잦은 행정 구역 변경은 샘골의 초대 교인들이 멀리 30 리나 떨어져있는 남양의 양노리 교회를 멀다 여기지 않고 다니게 한 배경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사회적 배경

1876년 일본이 우리나라에 진출한 이래로 그들의 침략야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골화되었다.
1894에 청일전쟁을 도발하였고, 여기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동아시아에서의 권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10년 후 또다시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 포츠머드 군항에서 러 일 양국의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회담은 이 조약을 주선한 미국 그리고 독일, 영국의 5대 강국이 일제히 한국 침략을 인정한 셈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마음 놓고 한국을 침략하고 나아가 만주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일제는 그 여세를 몰아 을사조약의 체결을 서둘렀다.
궁궐 안팎을 완전 무장한 일본군이 몇 겹으로 둘러싸고 서울 시내 전역을 감시하고 시내의 각 성문에 야포 및 기관총까지 동원한 가운데, 을사오적의 찬성 아래 고종의 윤허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조인을 하고 말았다. 강화조약은 1905년 9월 5일에, 을사조약은 동년 11월 18일 오후 2시에 체결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은 통감정치시대로 돌입하게 되며 이때부터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자 온 국민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상가는 철시를 했고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였으며, 백성들은 길거리로 뛰어나와 반대운동의 대열에 참가하였다. 조약체결을 찬성한 을사오적을 암살하자는 운동이 도처에서 일어나기도 하였고, 그들의 집을 불태우는 사건도 일어났으며, 그들을 규탄하는 연설회도 연일 열렸다. 그러한 가운데서 민족 운동가들은 일제의 속박에서 해방이 되려면 실력이 있어야 됨을 주장하며 구국계몽운동을 크게 일으키기도 하였다. 또 애국적인 유생들과 관료로 있던 이들은 파상적으로 상경하여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교회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의병들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 주권을 회복하고자 나섰다.

교회적 배경

허탈상태에 빠져 있었던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께서는 위로와 새 힘을 얻도록 인도하여 주셨는데, 그것이 곧 1907년에
평양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대부흥 운동이다. 이 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의료 선교사업에 종사하던
남 감리회 소속 선교사 하디(R. A. Hardie) 목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900년 원산에서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1903년, 너무도 자신의 선교사업이 부진함에 자책을 느껴 자신의 부
족함을 고백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하나님이 크게 은혜를 주셨다. 하디 목사는 당시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리고는 부끄러움과 얼굴의 혼돈과 더불어 내 자랑과 완악한 마음, 믿음이 적음과 그리
고 이런 것들에 인도되었던 많은 것들을 고백하였을 때, 그들은 처음으로 실제적 체험에 있어서 확신과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에 의해서 내가 어떻게 심령의 은사를 받게 되었는지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는 이런 체험을 한국 교회 교인들 앞에서 간증함으로써 한국 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다. 그 후 평양에서 하디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집회를 갖게 되었고, 이 운동은 서울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 운동에 있어서 가장 큰 불길은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는데, 사경회에 남자만 1,500 여 명이 모였고, 여자들은 들어갈 자리조차 없었다. 당시 상황을 블레어(W.N. Blair)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잇대어 일어나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소리 내어 울며 마룻바닥에 엎드려 주먹으로 마룻장을 치며 과거에 지은 죄를 통회하였다. 어떤 때는 한 사람이 일어나 죄를 고백한 후에는 온 회중이 소리를 내어 기도를 하는데, 수백 명이 이처럼 함께 기도를 할 때 받는 은혜는 참 놀라운 것이었다. 이처럼 죄를 고백하고 나서 울고 또한 기도를 하게 되니, 시간 가는 줄도 몰라 새벽 2시까지 계속되는 일이 예사였다.”

이 부흥운동으로 교회들은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정동교회 90년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06년 먼저 언급한 대부흥운동이 전국을 휩쓸기 시작했을 때, 우리 교회도 이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발전되어…… 도덕적인 향상과 더불어 양적으로 놀랍게 발전하여 교인 수는 유사 이래 전무후무한 3 배가의 기적을 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놀랍게 부흥하는 한국 교회를 보고, 미선교부는 1905년 이래 한국 선교연회로 내려오던 교회를 3년 만에 다시 완전히 독립시킬 필요를 느껴, 1908년 3월에 제 1회 한국 연회로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지방적 형편

샘골교회의 준비 시기는 남양구역 양노리교회(현 비봉교회) 때로 부터이다.
당시의 수원지방은 1893년 서울로부터 복음이 들어와 동탄면 장지리에 장지내교회(현 장천교회)가 최초로 설립되었고, 수원 및 공주 구역장에 선임된 스웨어러(W. E. Swearer, 한국명 서원보)선교사는 1901년 수원 북문 밖에 초가집을 사서 휴양관과 예배당을 겸하여 교육을 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종로교회, 수원 삼일상고, 매향여고로 발전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1898년 인천에서 남양으로 배를 타고 들어와 남양교회가 세워짐으로, 두 갈래의 길을 통해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그 후 장지리로 들어온 감리교회는 용인과 수원으로 각각 뻗어나갔고, 남양으로 들어온 교회는 남양 일대에 교회를 세움으로 남양 반도를 복음화하기 시작했다. 남양 지방의 선교는 샘골에서 30여 리 떨어진 양노리까지 이르렀는데,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자 전도의 손길이 결국 샘골에 까지 이르러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행정구역상으로는 안산군이요, 그 지역에도 몇 개의 교회들이 이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샘골에서 남양군에 속한 양노리교회를 다녔느냐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추측하건대, 당시는 안산군이지만 샘골이 광주군에서 안산군으로 옮겨진지도 얼마 안 되었고 샘골에는 남양 홍씨들(남양 홍씨 문희공파 23대손 홍의경씨가 남양에서 분가하여 샘골에 살기 시작했고 그의 후손 홍종한(洪鐘漢)씨의 2남 홍원삼씨가 교회를 설립하게 됨)이 대대로 살아와 그 친척들이 남양 지역에 흩어져 살아 그들과 자주 왕래가 있음으로 해서 안산보다는 남양 지역이 더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는 남양 구역의 홍승하(1863~ 1918)라는 유명한 평신도 전도자의 열성적인 전도 때문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샘골의 초대교인들은 남양 구역의 양노리교회에 다닌 것으로 추정된다.

양노리 교회

양노리교회(현 비봉교회)는 1900년 초에 세워졌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2-1903년이라고 추측되고 있는데, 그것은 1902년 5월에 남양구역이 6개 기도처가 있었으며 1903년에 가서 8개 기도처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때의 남양구역이라면 남양, 어소, 당산, 수촌, 제암, 비봉, 신남, 사강 등이었다.

양노리교회는 신안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교회는 남양구역의 여러 교회 중 하나였기 때문에 교역자는 주로 남양구역에 주재하고 있으면서 한 달에 한 번씩 다녀갔다. 이렇게 하기를 1949년 장태명 목사가 부임해서 독립구역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 동안의 역대 담임자를 보면 남양구역 시대에는 홍승하 전도사(1905~1908), 박세창 전도사(1908~1910), 김광식 전도사(1910~1914), 이창희 전도사(1914~1916), 김교철 전도사(1916~1917), 동석기 목사(1917~1919), 임응순 전도사(1919~1925), 방 훈 목사1926~1926), 홍형준 목사(1926~1927), 김교철 목사(1927~1928), 홍순호 목사(1928~1933), 박영석 목사(1933~1935), 이필주 목사(1935~1944), 허숙일 목사(1944~1947), 박영석 목사(1947~1953) 등이었다. 1950년 양노리 구역이 독립된 후에는 초대 담임자로 장태명 목사(1950~1953)가 왔고 그 후 조피득(1953~1954), 이광진(1954~1956), 박주혁(1956~1959), 김병희(1959~?) 등 여러 목사들이 부임해 왔다.

초대 순회 목회자 홍승하

샘골교회의 초대 전도자로 전해지는 홍승하는 남양교회, 양노리교회, 종로교회, 신남교회의 초대
전도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1902년 남양 구역장(권사 1년급)이었다가, 1902년 12월 존스 목사에 의
해 전도사로 하와이에 파송되어 하와이 신민회 초대회장, 감리교 선교회 조직 등 활발한 활동을
한 인물이다. 존스 목사로부터 ‘대단히 유능한 일꾼이요, 의지적인 결단을 가진 자’라는 평을 얻을
만큼 참으로 열렬한 선교열을 가지고 일하였던 홍승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해지는 이야기들
을 소개한다.
‘홍승하는 키가 크고 건장하여 씨름도 잘했다는데 화가 나면 주먹부터 나가고 나서 말을 시작하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원래 남양반도 앞에 위치한 영흥도 사람으로 하루는 서울에서 어떤 일
본인을 패고 달아나다, 아펜젤러 집의 담을 넘어 화를 면했는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 신앙
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홍승하는 인천에 주재하던 존스 선교사에게 연결되었고, 존스는
얼마 동안 홍승하를 지켜본 뒤 그에게 1900년 12월 25일에 세례를 베풀고 남양지역의 속장으로 임
명하였다. 남양은 인천에서 뱃길 따라 선교할 수 있던 곳으로 사역자를 물색하고 있던 중이었다. 홍승하는 뜨겁게 복음을 전했는데 전도도 성격대로 뜨거웠다.

홍승하의 맏동생인 홍승문도 형님과 비슷한 시기에 입교하여 함께 남양 선교에 나섰다. 이들 형제는 특히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 있는 사역으로 많은 이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했고 이들의 사역은 곧 남양 일대에 퍼져나가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전도한 지 일년 만에 남양 읍내를 비롯한 인근 마을과 영흥도, 대부도, 영흥도를 비롯한 섬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불과 1년 만인 1902년 봄에는 믿는 이가 70여 호에 2백 명 정도에 이르렀다. 통계에 의하면 그가 떠나기 전인 1902년 5월 남양 구역에 그가 설립한 6개의 기도처가 있었고, 1903년 초에는 8개의 기도처와 131명의 입교인 및 학습인이 배출되었다.

한편 홍승하는 선교사 자격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하와이 이민 102명과 함께 1902년 12월 22일 미국상선 게릭호(S. S. Gaelic)편으로, 제물포항을 출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게 된다. 그 해 8월 7일에는 애국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였고, 11월 10일에는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를 설립하는데 이 교회가 해외에 설립된 최초의 한인 교회의 효시가 된다.

1904년 11월 귀국 후, 아내를 잃는 슬픔을 겪었으나 복음사역에 열심히 투신하여 강화와 인천 내리교회 등에서 사역하다가 1907년 집사목사안수를 받고 공주지방으로 파송되어 스웨어러와 함께 충청북도의 감리교 선교를 개척하였다. 1908년 공주지방에서 수원지방이 따로 조직되어 떨어져 나가자, 그는 공주지방의 공주교회로 파송되어 공주교회를 돌보면서 인근지역선교를 감당하였다. 이와 같이 홍승하는 수원지방 출신의 사역자로서 초기감리교 선교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고. 1912년 장로목사가 된 후 수원종로교회 목회를 담임하며 제천, 음성을 포함하는 충청북도 지역과 여주, 이천 등 경기도 동부지역, 남양, 안산 등 서부지역을 순회하며 신앙을 지도하였다. 홍 목사는 나중에 다시 하와이로 돌아가 선교활동을 하다가 55세에 귀국하여 1918년 2월 11일 수원에서 별세하였다.

※ 이 글은 주로 홍석창 목사님의 저서 <상록수 농촌 사랑>, <수원지방의 발자취 - 수원지방 70년 역사>와 목사님의 미공개 논문 등을 저자와의 동의 하에 인용하였습니다.

교회설립 (1907년)

창립 당시 상황에 관한 확실한 역사적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해 구전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샘골교회는 1907년 7월 3일 홍원삼(洪源參, 1870~1945) 씨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의 노년시대에 교회 출석이 어려웠던 점을 문제 삼는다 해도 남겨진 기록과 증언에 의해 홍원삼씨가 설립자임을 확인할수 있다. 설립 당시의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7년 7월 3일 샘골교회가 탄생되기까지 먼저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계셨고,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앞장서서 직접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일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홍원삼 씨와 홍순호(1883~1960) 형제이다. 이들은 5남매 가운데 둘째와 셋째로서, 홍원삼 씨가 형이요 홍순호 목사가 아우이다. 이 홍씨 가문이 샘골에 정착하기 시작한 때는 남양 홍씨 문희공파 23대손인 홍의경 씨가 남양에서 분가하여 이곳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1870년 8월 18일 수원군 반월면 사리 천곡에서 태어난 홍원삼 씨는 어려서부터 부지런하고 근검하여 훗날 많은 재산을 모아 약 100 석지기가 되었다. 1907년은 홍원삼 씨가 37세가 되는 해로, 그는 젊었을 때 30리 길을 걸어서 양노리교회를 다녔는데, 점차 나이가 들게 되자 다니기 힘들고, 그의 신앙도 깊어짐에 따라 가족을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어, 내 동리에도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의 집에서 첫 예배가 드려짐으로 하여 샘골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1911년에는 사리 63번지의 김정태 씨의 땅을 빌려, 그 터 위에 초가로 된 6칸짜리 교회당을 지었다.
샘골의 성전 건축에 수원지방 교회들이 모두 놀라워하였는데 왜냐하면 개척된 지도 얼마 안 되어 그렇게 손쉽게 교회당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결과는 전적으로 홍원삼 씨의 믿음과 재정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흥랑 할머니는(홍원삼씨 처, 1967년 증언 당시 82세) 이웃 마을의 교회에 다니는 아들을 ‘양반의 망신이요, 집안 망신이라’고 쫓아낸 시아버지와 그래서 차례도 참석하지 못하는 남편 때문에 행주치마에 눈물을 감추고 살았던 지난날의 비화 속에 시동생마저 ‘아버지 저 신학교 가겠습니다’ 라는 무서운 결의를 표명해 두 아들을 다 잃었다며 기절한 시아버지였지만, 결국 두 아들의 신앙에 굴복함으로 시댁이 샘골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홍원삼 씨의 3주기 추도 기념예배 시(1948년 1월 6일) 전재풍 목사는 추도사에서 다음과 같이 홍원삼 씨를 기리고 있다.
‘개국 478년(1870년) 8월 18일 수원군 반월면 사리 천곡에서 탄생하셔서 유년 시대로부터 天賦하신 稟性이 온유겸손하시며 忠孝勤儉하시와 治産作業에 큰 성공을 하신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바입니다. 한 국가를 중흥케 하는 창립의 인물이나 한 가정을 부흥케 하는 成家의 주인이나 기성공에 이르러서는 동일한 이치가 있는 것같이 많은 풍상을 겪으며 세상과 더불어 분투하신 것은 피치 못할 일이었습니다. 1911년에 하나님의 말씀이 조선에 들어오자 선각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입어 신앙생활을 시작하시고 천곡에 위선예배당을 신축하야 교회를 설립하셨으니 진실로 생명수가 흘러넘치는 泉谷(샘골)을 이루어 놓으신 큰 은인이 되시며 특별히 窮交貧族(궁교빈족)에 구제하는 일과 공공사업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희생을 하셨으며 약한 자를 많이 도와주시고 우는 자로 더불어 한 가지 우시며 웃는 자로 더불어 한 가지 웃으시는 輿人同樂하시고 愛人如己하라 하신 주님의 교훈을 많이 실행하셔서 후진에게 큰 모범이 되십니다.’
홍원삼 씨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온 국민이 기뻐하는 가운데 그 기쁨을 함께 누린 후, 그 해 음력 11월 26일에 향년 7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교회이름에 대하여
일제의 관보 제1728호 소화 7년(1933년) 10월 10일자 기록에 보면 사리교회가 천곡(泉谷)교회로 바뀐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을 보면 사리가 샘골임을 알 수 있다.사리 또는 일리나 이리라는 이름들이 일제가 들어와 행정구역을 나눌 때 그렇게 한 것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사실은 영조 35년(1759) 때부터이다. 일제가 들어오기 오래 전부터 행정구역을 지칭할 때 일리(一里) 이리(二里) 삼리(三里) 사리(四里) 또는 일동(一洞) 이동(二洞) 삼동(三洞) 등으로 지칭한 것이 광주군만 해도 경안면(慶安面)도척면(都尺面)초부면(草阜面)낙생면(樂生面)의곡면(儀谷面)왕윤면(王倫面)송동면(松洞面)등 다수 있었다.
이렇듯 샘골교회가 사리교회로 불린 것은 행정구역상의 이름을 따른 때문이었으며, 그 교회이름이 1929년 감리사 보고 중 샘골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졌다가 다시 1932년 10월 8일에는 천곡으로, 그리고 1998년 샘골이란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안산구역의 형편(1908~1934년)
안산구역은 중심교회가 무지내교회였기에 처음에는 무지내구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는데, 1910년경의 무지내구역의 형편은 수원 지방 내 9개 구역 가운데 큰 구역이 되는 구역으로서 입교인이 57명, 학습인이 172명이나 되었다. 그러다가 1912년에는 안산군에 여러 교회가 있음을 감안해서 그 이름을 무지내 구역에서 안산 구역으로 바꾸었는데, 그 산하에 7~8교회를 두고 있었다. 그 여러 구역 가운데 가장 큰 구역이 무지내였고 그 다음이 샘골이었다. 그 때 구역 형편을 보면 입교인이 78명, 세례인이 8명, 세례 아동이 9명, 학습인이 309명, 원입인이 209명이었다.

안산지역과 광주군에서 온 반월지역은 교회 수(안산지역 7교회 반월지역 3교회)의 균형은 맞지 아니하지만 거리상 멀어서 분구역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1924년부터는 사리(샘골)에 목사 주택을 세우고 전도사를 두는 가운데 1929년에는 반월지역의 3교회를 김동일 전도사가 맡아 두 구역을 편의상 나누고 있었다.총독부 관보에 나타난 구역담임자 신고를 보면 담임목사가 한 사람인데도 안산지역과 반월지역으로 나누어 신고하고 있다.

김동일(金東一)전도사에 관하여는 그가 1919년 이후 목회활동을 그만두었다고 하나 1929년 김홍제가 샘골로 부임할 때까지 무지리 또는 사리에 담임전도사로 있었고, 그 후 1931년 10월 12일에 가서야 전도사 직에서 물러났다. 구역 담임자들은 김홍제 목사만 제외하고는 무지내 교회에 주재하고 있으면서 안산구역의 7~8교회를 순회하며 교회를 맡아 일하는 순회목회자들이었다. 1931년에 와서는 그 넓은 지역을 목사 한 사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장명덕 전도사를 두고 담임 목사는 무지내교회에, 전도사는 샘골교회에 각각 주재케 하였다. 이 때의(1908~1934년) 안산구역 담임자 상황(연회록과 총독부 관보상의 기록들을 종합)은 다음과 같다.
구역순행자 홍승하
( ~1915)
김병권
(~1919)
- - - -
구역담임자 김동현
(~1912)
김동일
(~1919)
김영열
(~1921)
김광식
(~1929)
김홍제
(~1932)
유철수
(~1934)
주재 교회 무지리 무지리 무지리 거모리 사리(샘골) 무지리
돕는 이     김동일(1919~1931) 장명덕(1931~)
주재 교회     무지리/사리 사리(샘골)
이 시대에 교회를 섬긴 일꾼들

① 최초의 열매 홍순호 목사
훗날 목사가 된 홍순호 씨는 홍원삼씨의 동생으로 그 때 나이 25세가 되는 씩씩한 청년이었다. 1907년 샘골교회가 설립됨으로부터 그는 중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젊고, 총명하고, 열심이 있어 예배를 인도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었다. 모든 교회개척이 그렇듯이 처음부터 독립할 수는 없었다. 주일 낮이면 멀지만 여전히 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주일 밤이나 기도회 날은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럴 때 홍순호 청년이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이렇게 홍순호 목사도 그 당시의 모든 전도인들처럼 평신도 전도자로서 그 첫발을 내디뎠다. 홍순호 씨가 직접 예배를 인도하게 되니 더 배우지 않고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순회 사경반, 지방 사경반을 거쳐 장래 교역자로서의 사명을 꿈꾸며 신학반을 다녔다. 1903년 선교부 보고에 의하면, 사경반은 지방교회의 지도자들을 모아서 성경과 교회 지도법을 가르쳐서 각기 자기들의 교회로 돌아가서 교인들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시험을 치러서 시험에 합격한 이에게는 증서를 주고, 지방 사경반에 보내서 설교자에게 필요한 과정을 가르치고, 장래 교역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신학반으로 보내어 완전한 교역자로서의 교육을 시켰다. 신학반은 농한기를 이용해서 성경 설교법, 교회의 예식과 정치 등을 가르치는데, 처음에는 대개 1년에 2주일, 후에는 2개월로 늘여 교육하였다고 한다.
홍순호 씨는 이런 두 과정을 다 거쳐 이제는 어엿한 평신도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정식 전도자가 되기 전에 이미 재능과 열심이 인정되어 남양구역의 당산 신남교회를 맡기도 하였다. 1931년 수원지방 감리사 이익모 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남양구역은 홍순호 목사의 조리 있게 일 잘하심으로 진흥 중에 있으며, 양노리교회는 3,4년간 폐문하였던 교회였는데 금년에 부활하였습니다. 금년은 홍순호 목사의 부인이 매주일 예배 인도하는 목사의 직분을 행하오니 더욱 감사하오며…….” 라고 한 것을 보면 부부가 대단히 열성적이었던 것 같다. 그는 1913년 협성신학교를 다니면서 충남의 서산 교회를 맡기도 하였다. 1916년에는 협성신학교를 4회로 졸업하였고, 1918년에는 서리전도사로 청양교회에 파송받아 1920년에 목사안수를 받고 강경교회를 맡았으며, 1922년에는 정회원이 되어 음성, 천안, 진천, 서강, 남양, 당진, 당산, 수촌, 원시리 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두루 목회를 하였고 1955년에 은퇴한 후 1960년에 그의 생을 마쳤다.

② 이원실 권사
1910년대의 샘골교회를 이끌어 나간 평신도 가운데 중심적인 인물로는 이원실 권사를 들 수 있다. 그는 샘골교회 최초의 권사로 교회 일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그의 본래 고향은 수원으로 홍씨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와 (홍순호 목사 매부) 살게 되었는데, 부인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어려운 가운데 혼자 믿으면서도 매우 열심히 믿었다. 그는 일자무식이면서도 기도도 열심히 하고 청산유수로 설교도 잘하였다. 그의 가정은 안산에서 순회 목사가 오면 숙식을 전적으로 맡아 제공한 유일한 가정이었다. 그는 1918년 김순봉 전도사가 샘골로 오기까지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간 유일한 평신도 지도자였다. 이 권사야 말로 샘골교회가 거둔 아름다운 열매 가운데 하나였다.

③ 김순봉 전도사
김순봉 전도사는 1896년 1월 20일 화성군 서신면 매화리에서 김경보의 5남매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곧이어 17세에 어머니마저 잃게 된다. 5남매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각각 흩어졌고, 김순봉은 친척집에 보내어져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어깨 너머로 글을 배우며 3~4년을 지내다가 20세가 되어 양노리 홍씨네 집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그 가정이 마침 믿는 가정이라 그가 22세 때, 감리교 협성신학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으나 사정상 2년 만에 중퇴하게 되었다. 그 후 안두리 교회 본처 전도사로 1년간 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 여관업을 하였으나 실패하여 놀고 있던 중 1918년에 홍 순호 목사의 소개로 샘골교회에 초빙되었다. 이렇게 해서 샘골교회로 오게 된 김순봉 전도사는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가운데 있었으나 이웃에 사는 이원실 권사와 뜻을 같이하여 교회 봉사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고 한편으로는 약장사를 하면서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김순봉 전도사는 반월면 책임자가 되어 반월면 운동을 주동하였다. 1919년 4월1일 반월면 반월 장터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수천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른 후 동으로 군포장, 북으로 구룡동, 서로는 본오리, 범실, 들목 쪽으로 가면서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과 면장이 온순한 어조로 간곡히 제지하자 해산하였다. 이 일로 해서 한 2년을 숨어 다니며 어려움을 겪었다.

김순봉 전도사는 결국 생활고로 1937년에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했으나, 그 전의 약 이십여 년 동안 자기의 생활을 잊은 채, 교회 일을 열심히 하였다. “내가 신학교를 나와 평생을 전도자로 몸 바쳐 일하려고 했는데, 그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지 막히고 이제 평신도 사역자가 되었으니 평신도로서나마 충성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정성껏 교회 일을 도왔다. 그 기간 동안 목회자가 오지 않는 때에는 모든 집회를 인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심방이며 전도며 모든 교회 일에 전적으로 힘써 일하였다. 그 동안 주택을 둘씩이나 지었고 최용신 양이 온 후 학술원 원장으로 학원을 위해 일하였으며 최용신 양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그의 뒤처리를 다하였고 그 후 만주로 이주하였다. 거기서 10여 년을 살다가 해방을 맞아 다시 서울로 돌아와 1970년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김순봉 전도사는 성품이 강직하고 항상 남의 장점을 보기를 좋아하고 그 마음이 본래 착하여 세상 사업에는 적격자가 못 되어 거듭 실패를 했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누구보다 적격자였다. 그는 신앙의 모범이 될 뿐 아니라 책임감이 있게 교회 일을 하였으므로 그 결과 1920년대의 샘골교회는 크게 부흥되었다. 건물을 짓고 목사를 초빙하고 조그만 예배당이었지만 가득가득 차서 예배를 드렸다. 이러한 부흥 속에 1930년대를 맞이하였다. 당시에 최용신 양이 학원을 개원하고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치며 언덕배기에다 건물을 지으니 이제는 안산 구역에서도 제일가는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안산 구역을 안산 동 서 구역으로 나누게 되었고 샘골은 안산 동구역 중심교회로 목사를 모시게 되었으며 그 초대 목사로 전재풍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것을 생각할 때 김순봉 전도사야말로 평신도로서 샘골교회를 교회답게 가꾸어 놓은 은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두 개의 주택을 건축

1907년 교회가 처음으로 홍원삼씨에 의해 시작되고, 1911년 성전을 짓게 되면서 교회는 굳건히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부터 교회는 날로 부흥하게 되어 그 동안 안산구역의 모 교회로서 목사가 주재하고 있었던 무지내 교회를 중심한 시흥군 지역교회를 샘골을 중심한 수원군 지역교회가 따라갈 뿐 아니라 대등한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1924년에는 수원군에 속한 안산구역의 중심교회인 샘골에다 주택을 하나 짓기로 하였는데, 점섬에서 집을 헐어다가 9칸 크기의 주택을 세웠다고 한다.

주택은 처음에는 순회 목사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1929년에 김홍제 목사가 안산구역 담임자로 부임하면서부터는 무지내에서 샘골로 담임자의 숙소를 옮겨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최용신 양이 부임하면서 안산구역 담임 목사의 숙소는 또 다시 무지내 교회로 옮겨지고 그 빈 주택에 최용신 양이 들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1년에 장명덕 전도사를 안산구역 전도사로 파송하여 천곡에 주재케 하면서 주택이 모자라 또 다시 네 칸 크기의 주택을 지었다. 이렇게 하여 1920년대로부터 부흥하기 시작한 교회는 1930년 초에 와서는 정상을 오를 만큼 크게 부흥하였다.

천곡 학원 설립과 교회발전
1929년에 천곡(샘골)교회에 교사로 파송된 장명덕은 부임해 오자마자 교회광고를 통하여 30명의 어린이를 모아 한글, 산수, 찬송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안산구역 담임목사는 김홍제 목사였다. 장명덕이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자 오목골, 각골, 구룡동 등지에서 어린이들이 모여들어 50여명이 되었다. 이것이 상록수 천곡학원의 시작이다. 1년 정도 지나니까 한글을 깨우치는 어린이들이 부쩍 늘어났다. 장명덕의 노력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장명덕의 카랑카랑하면서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목소리와 똑 뿌려지는 수업방식은 가갸거겨, 1234를 가르칠 때면 마치 어린이의 머리를 열어젖히고 족집게로 한자 한자를 집어넣는 것과 같아 배우는 어린이들이 한없이 쉽게 배웠고 재미있어 해서 무척 똑똑한 교사로 칭송받았다고 한다. 원래 1년 과정으로 시작한 천곡학원 공부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학부모들이 앞장서 더 가르쳐 주기를 간청하였다. 천곡학원이 안산구역의 가장 모범적인 학교로 발전하였다는 소문이 밀러 선교사에게 전해지자 그녀는 천곡학원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기로 정하고 학원을 더 발전시키기 위한 조치로 여성기독교청년회(Y.W.C.A)에 요청하여 농촌사업 후보지로 선정되도록 하였으며, 여성기독교청년회(Y.W.C.A)를 통해 원산 루씨 여학교와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한 최용신을 교사로 채용하여 파송하였다.

이렇게 하여 1920년대로부터 부흥하기 시작한 교회는 1930년 초에 와서는 정상을 오를 만큼 크게 부흥하였고, 1931년 최용신 양이 부임해 오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고 장명덕은 밀러 선교사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안산구역 전도사로 파송받게 되었다.
천곡학원에는 배움에 굶주린 어린이들이 계속 몰려와 60명을 정원으로 하여 3부제 운영하여도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최용신은 학원인가를 정식으로 받아 본격적인 교육을 하고자 하였으나 일본 당국은 농촌운동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심어 준다는 이유로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교회를 비롯한 사회 유지들이 나서 1932년 5월 천곡학원은 정식학원으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이 때 교회의 형편을 황종우 장로는 말하기를 유철수 목사 때(1931) 약 70여 명 모였고, 하기학교는 해마다 하였다고 한다. 김종규 목사는 말하기를, 100 여 명 이상이 모였으며 수원교회 다음으로 6칸 예배당이 꽉꽉 찼다고 한다. 아마도 학원이 한창 흥왕할 때(1935)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① 최용신 선생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崔昌熙씨 2남 3녀 중 차녀로 출생(1909년 8월 12일)한 최 용신은
일찍부터 가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하였다. 1928년 3월, 감리교단이 설
립한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19세)를 졸업하고 서울여자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를
입학한 최 용신은 일찍부터 농촌계몽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최용신은 루씨여자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저의 희망은 농촌에 들어가 농촌계몽에 일생을 바치는 것”이
라고 당당히 밝혔다고 한다. 이러한 그녀의 사상은 그녀가 졸업시에 쓴 “교문에서 농촌으로”라는
글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 오늘 교육받은 여성들이 복더기 쌓인 농촌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이가 드문 것은 사실인 동시
에 크게 유감된 바이다. 여성도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 농촌으로 하여금 어두움 속에
서 걸어 나오게 못한다면, 이 사회는 어느 때까지든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농촌 여성의 향상은 우리들의 책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유달영, “최용신 전기-눈 속에 피는 나무”, 중앙출판공사, 1978년, 255-257쪽)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한 최용신은 스승 황에스더를 만나게 된다. 황에스더는 이화학당을 거쳐 미국에서 교육학 및 농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협성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농촌운동을 하였는데, 최용신은 스승 황에스더의 영향으로 1929년,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 1930년, 경상북도 포항읍 옥마동에서 농촌활동을 하다가, 1931년 10월 당시 수원지방 여선교회 총무로 있던 밀러(L.A. Miller)부인의 소개로 천곡으로 오게 되었다. 40여 가구의 샘골 마을은 1907년에 설립된 교회에 주민 거의가 출석하는 복된 마을이었다. 최용신의 농촌 자금은 황에스더의 주선으로 여자기독청년회(Y.W.C.A)에서 부담하였다.

천곡에 입성한 그녀는 우선 가까운 동네로부터 시작해서 먼 이웃동네까지 찾아 다니며 인사를 올리며 학생 모집에 들어갔다. 반응이 신통치 못하였으나 최용신은 조금도 낙심치 않고 계속 설득을 벌여 끝내 약 40명의 아동들을 모집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밤에는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한 야학을 실시하여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깨우쳐 주었다.

시작한 지 2개월 정도가 되니까 그녀의 헌신이 차차 알려지게 되니,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 좁은
교회로서는 넘쳐나는 학생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최용신
은 교회를 중심으로 “천곡 학술학원 건축발기회”를 조직하고, 동네 유지들을 찾아 다니면서 기
금을 모아갔다. 기금모금과 동시에 건축을 시작하였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나서서 돌
을 나르고 새끼를 꼬고 터를 닦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일치 단결하여 학교를 세워, 한 달 남짓
한 1932년 10월 27일에 정초식을 거행하였고, 추운 겨울에도 공사를 강행하여 드디어 1933년 1
월 15일, 천곡학원을 건축하게 되었다. 1933년 봄이 되어 학생을 새로 모집하니, 예년보다 훨씬
많은 110명이나 몰려와, 새로 지은 교사마저도 모자랐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은 반드시 예배로부터 시작하여 보통 6시간 또는 7시간 계속되었는
데, 보통학교 6년 과정을 단 2년 만에 마치는 것이라 벅찬 과정이었다. 그녀는 한글, 역사, 성경
등의 과목에 중점을 두고 가르쳤는데, 이러한 과목을 통해서 신앙과 애국심을 고취시켜주기 위 해서 최선을 노력을 다한 것이다.

1934년 3월 최용신은 중단했던 학문을 계속하기 위해서 일본의 고베여자 신학교로 유학을 떠나
지만, 3년간의 힘들고 고된 농촌사업에 지친 때문인지 건강상의 문제로 유학의 길을 도중 하차,
귀국하고 만다. 그녀는 전재품 목사의 사모 김복희의 권유로 제 2의 고향인 천곡으로 오게 되자,
천곡 사람들의 기쁨은 대단하였다. 그들의 완쾌를 위한 기도와 보살핌으로 최용신의 병세는 차
츰 호전되었고, 그녀는 천곡을 위해서 전보다 더욱 열심히 뛰게 되었다.그러나, 육신을 돌보지
않고 그녀의 헌신과, Y.W.C.A지원금 중단으로 인한 자금마련을 위한 각계 방문 호소 등의 활동
으로 다시 건강을 잃게 되어,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2차에 걸친 수술 끝에, 35년 1월 23
일 오전 0시 20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그녀의 병명은 “장중첩증”이었는데, 이는 극도의 과로와 영양부족 탓이었다. 그녀는 학원 이사
중에 한 사람인 안홍팔 씨의 손을 잡고 유언하였다. “...만일 제가 떠난 후에라도 학원만은 잘
살려서 여러분의 손으로 훌륭한 학원을 만들어 주세요... 제가 약혼한 지 올해가 10년이어요.
올 4월부터는 두 사람이 힘을 모아서 농촌을 위해 일하고자 약속했지요. 그런데 이대로 떠나니 그 사람에게 미안합니다... 내가 죽은 후에는 학원이 잘 보이는 곳에 묻어주세요... 교회와 여러 이웃 친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은혜를 갚지 못하고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② 엡웻 청년회 활동
엡웻(Epworth)청년회란 감리교회 청년회인데, 그 시작은 1889년 미국 감리회 중앙교회에서부터이다.
이 회가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와 조직된 것은 1897년 5월 5일이다. 엡웟(Epworth) 이란 명칭이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의 탄생지인 만큼, 그 정신은 바로 웨슬리의 신앙정신이다. 이 모임은 1897년에 들어와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보고 전국적인 규모의 엡웟청년회가 상동교회에 모여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하면서 탄압을 받아 쇠퇴일로를 걷다가, 3.1 운동 직후에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여 1925년경에는 최고의 절정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써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 가장 큰 원인은 당시의 청소년들의 종교교육기관으로는 엡웻청년회가 유일한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천곡교회의 엡웟청년회가 조직된 연도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 1933년 3월 감리회보에 실린 총리원 교육국에 등록된 엡웟청년회 통계를 보면 수원지방에서 종로교회와 천곡교회만이 조직되어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수원지방 교회들이 청년회가 아직 조직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936년의 통계에 의하면 그 후 점차적으로 조직 되었다. 그리고 천곡교회는 다른 교회와는 달리 소년, 청년회가 모두 많은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엡웻소년 25명, 엡웻청년 20명)

이렇게 여느 교회가 가질 수 없는 많은 회원을 가진 천곡 엡웟청년회는 사업에 있어서도 그만큼 활발하게 움직였는데, 그 대표적인 젓이 금주단연 운동이다. 청년들 자신들이 먼저 금주 단연하기로 서약을 한 후, 동리의 노인들을 찾아가서 금주단연을 해야 할 이유를 말하고 노인들도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러한 청년들의 갸륵한 정신에 탄복한 노인들은 너도 나도 금주를 선언하고 단연하기에 이르렀다. 청년들은 노인들의 뜻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담배를 끊겠다고 하는 노인들에게서 담뱃대를 50전에 사오고, 술을 끊는 이들에게는 방석을 하나씩 해드렸다.

그리고 또 연극을 준비해서 천곡교회만이 아니라 안산구역 일대를 순회하며 연극을 통해 금주단연을 선전하기도 하였다. 1929년 연회에서 행한 감리사 보고에 의하면, “천곡교회에서 2월 4일 밤에 전도 강연과 환등과 조혼의 폐해라는 소년 극에 불신자들이 많이 감동되었으며, 그곳에도 금주금연의 선전이 있었는데, 불신자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많은 찬성과 자기의 자녀들을 우리 교회로 보내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 이 글은 주로 홍석창 목사님의 저서 <상록수 농촌 사랑>, <수원지방의 발자취 - 수원지방 70년 역사>와 목사님의 미공개 논문 등을 저자와의 동의 하에 인용하였습니다.

1934년에 전재풍 목사를 천곡에 모시면서 안산은 분구역 되어 안산 동, 서구역이 되었는데, 그때 천곡은 안산 동구역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7년에 이천국 목사가 부임하면서 천곡구역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의 천곡교회는 안산 동구역의 중심 교회로서, 기술한 바와 같이 큰 부흥을 가져오던 때였다. 김순봉 전도사, 장명덕 전도사, 최용신 양 등의 활약으로 8칸 크기의 교회당에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차 예배드렸고, 천곡교회의 중심 동리인 천곡 동민 30여 호 중 한두 집만 빼고는 모두 인가귀도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교회는 교계나 사회적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전재풍 목사 시대 (1934~1954년)

① 학원 사업
학원은 1934년에 들어서면서 일본경찰이 천곡학원의 급격한 발전에 부담을 느껴 통제와 간섭을 해오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천곡학원 운영비와 최용신의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던 Y.W.C.A의 지원비도 절반으로 줄었다. 또한 최용신이 1934년 3월 일본 고베 여자신학교로 유학을 떠남으로 천곡 학원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때, 전재풍 목사가 천곡(샘골)교회 담임 목사로 파송되었다.
그가 천곡에 오게 된 것은, 교회가 크게 부흥되어 교역자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최용신의 유학으로 학원을 운영할 선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사모 중에서 학원 운영이 가능한 분을 찾던 중, 홍순호 목사의 소개로 장단에서 목회하던 전재풍 목사가 초빙되게 된 것이다. 사모 김복희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재원으로 천곡학원을 운영할 만한 자격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복희 사모는 천곡(샘골)교회로 오자마자, 최용신이 떠난 천곡학원을 정상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최용신이 병환으로 6개월 만에 귀국했을 때, 다시 천곡학원으로 오도록 하였다. 당시 학원은 재정적으로 Y.W.C.A의 보조가 전면 중단되면서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는데, 최용신은 장명덕의 간병을 받으며 어려운 학원의 사정을 잡지에 기고하는 등 병중에도 학원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다행히 수원농림학교 유달영을 비롯한 학생들의 정성 어린 기부금으로 천곡학원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용신은 1935년 1월23일 교인들과 학부형들의 간절한 기도 속에 소천하였다.

당시의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는 전재풍 목사 사모인 김복희 장로의 기억에 따르면, 교인은 약 40-50 명 모였는데, 교회는 약하고 식구는 많아(6남매) 대단히 어려웠다고 한다. 교회에서 쌀 8말, 보리쌀 소두 2말을 받았고 자신은 학원에서 약간 나오는 것으로 살았으며, 대동아전쟁 때는 강원도 김성에서 유치원을 해서 사 놓은 땅을 팔아 그것으로 연명하였다고 한다. 장명덕 전도사가 둔대로 간지 1년 만에, 정식 전도사로 파송 받아 천곡에 다시 왔을 때 밀러 선교사가 사례비로 15원 주었고 쌀은 천곡에서 4 말, 둔대에서 2말, 반월에서 1말, 초지에서 2말을 주었다. 그때 전재풍 목사는 30원 가량 받았다. 여기 오기 전에 장명덕 전도사는 상동교회에 있을 때에 40원 받았을 때였으니까 역시 시골이라 적은 액수다.

그 때 장명덕 전도사와 전재풍 목사는 한 교회 안 숙소를 같이 하였지만, 특별한 일 외에는 서로 각각 행동을 하였다. 전재풍 목사는 천곡, 반월, 둔대, 야목을 담당하고 있었고, 장명덕 전도사는 앞서 4교회 외에 초지를 더 맡았고 구역 순행도 서로 엇갈려 순행했기에 함께 한 교회를 가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이렇게 많은 교회를 순행하다 보니 당시의 교역자의 생활은 “다리품 팔았다”라고 할 만큼 많은 거리를 걸어 다니는 생활이었다.

최용신 양이 소천한 후 여러 선생이 잠깐씩 다녀갔지만, 그 후 20여 년 간은 주로 김복희 사모에 의해서 학원이 운영되었다. 전재풍 목사의 부인 김복희 사모는 그의 인격이나 학벌 사상 경험 신앙으로 보아 최용신 양 못지 않은 훌륭한 선생이었다. 김복희 사모의 활동은 최용신의 일본 유학 직전부터 시작되었고 장정심 선생과 함께 일을 하였다.

1935-1936년도 감리교회 요람을 보면 이 때 학원의 정식이름은 “천곡학술 강습회”이며 원장은 김순봉이었고 창립 년도는 1932년, 교사는 2명, 학생은 100명, 졸업생은 15명이었다. (기독교 대한감리회 총리원 교육국, 한국감리교회사, 서울, 총리원 교육국, 1975, p337)

당시 졸업생을 연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제1회(1934. 3) 박문성 외 9명,
제2회(1935. 3) 홍석필 외 6명,
제 3회(1936. 3) 신필남 외 미상,
제4회(1937. 3) 주병수 외 3명, (5, 6, 7 회는 미상) 등이다.

천곡학원의 학제는 2년제였는데, 당시 보통학교 4년제와 다른 것은 당국이 2년 이상은 허가를 내주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최용신 이후 선생들은 자주 바뀌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모두 신문을 통해 자원하여 찾아 왔으나, 제대로 대우받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일제 말 탄압으로 인해서 운영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37년 봄에는 오야마(大山)라는 일본인이 샘골로 이사왔다.
그는 측량기사로 반월면 근방의 남산 뜰에서 살면서 양파, 고구마, 호박 등 밭작물을 재배하며 살았다. 당시 샘골이 농촌지역으로는 타지역보다 발전되어 있었기에 오야마는 자기의 이상을 펼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던 차에, 김 순봉 전도사가 떠난 집을 사서 샘골에 합류하게 되었다. 오야마가 샘골로 온다고 할 때, 1935년 이후 극심한 탄압과 운영난에 봉착한 학원을 운영하던 사람들은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염석주 씨는 철저한 배일사상가였기 때문에 그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오야마는 이사 온 초기, 교회와 충돌없이 잘 지내면서 학원도 도왔다. 그러나 뒤에 학원 원장이 되어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햇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신사참배를 하고 소위 국민서사를 왼 다음 일본 도쿄에 있는 궁성을 향해 절을 시켰다. 그리고 학원을 반월공립보통학교의 분교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는 학원을 못하게 하는 것을 물론 학원 건물마저 빼앗으려 했다. 그 때는 학원 건물을 예배당으로 겸용하고 있었으니 결국은 교회마저도 폐쇄하려는 속셈이었다. 담임자 전재풍 목사와 학원 이사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고, 수원 종로교회의 조상문 감리사와 함께 재판을 걸어 이겼다.
(김광신, 우리 어머니- 김복희 장로의 일생, 우일문화사, 1980, p41)

오야마와의 재판이 벌어졌을 때 앞장 선 몇몇 교회의 지도자 외에 가장 열렬하게 싸운 이는 부녀자로서는 인철이 어머니였고(안원순 증언), 남자로는 학원 이사인 홍수득씨였다. 오야마는 재판에 지게 되자 천곡학원에서는 자연히 손을 떼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 대신 본오리 산 언덕에 두 칸의 건물을 짓고 반월보통학교 분교를 만들어 학원사업을 계속 방해하였다. 이렇게 되니 천곡학원은 탄압에다 학생 난에 부딪혀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오야마는 동리 사람이나 교인들을 볼 낯이 없어 결국은 해방을 앞두고 빈정포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 동안 탄압으로 인해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해 오던 교회도 다시 활기를 되찾었고 굳게 닫혔던 학원의 문도 다시 열리게 되었다. 김복희 사모는 다시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하고 김복희 사모의 개인 사정으로 문을 닫게 되었는데, 그 때의 상황을 김복희 사모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저는 어떻게 하든지 이 강습소를 제대로 유지해 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지요. 학교가 멀어서 다니지 못하는 근방의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저 혼자서 그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목사님의 목회를 돕는 일과 여러 명의 자녀들 교육문제 등 너무도 사정이 어려워서 끝내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해방과 더불어 열렸던 학원의 문이 아쉽게도 다시 닫히게 되었다.

② 영아 보건회 조직
총리원 전도국 내에 1934년부터 여자사업부를 두어, 여선교회 활동을 지도하였는데 전도과, 종교교육과, 유치원사업과, 보건사업과, 가사와 구락부사업, 지방사역자 양성 등이 있었다. 그런데 보건사업과에서는 전국에 영아부를 설치하고, 기 파송된 전도사들로 영아부를 지도하도록 하였다. 또한 간호원이나 의사가 순회하며 진료도 하고, 위생 강좌도 열어 “위생, 아동건강, 영아 음식 분할표” 등 각종 자료를 만들어 공급해 주었다. 1937년, 한소제(韓小濟) 박사 일행이 천곡을 방문하여 천곡에서 영아부를 신설하였고, 이어 둔대, 반월 등지를 순회 진찰하고 돌아갔다. 이 때의 방문기는 아래와 같다.

“5월 21일 일은 아침, 수원에 갈 준비로 분망하였다. 오전 8시 50분, 경성역을 떠나가 기차로 상인천에 이르니, 때는 9시 47분이었다…(중략)… 밀러 부인이 준비한 자동차를 타고 곧 천곡리로 떠났다. 리(里)수는 미상하나 들은 바에 의하면, 상인천서 천곡까지 80리가 된다 한다. 그 동안에 아름다운 산수와 점점한 전답을 지났는데. 그 아름다운 자연은 실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 때 조금 전에 어떤 길가에 다다르니 천곡교회 목사 이천국 씨와 교우 여러 분이 나와 맞으신다. 거기서부터는 자동차를 타지 못하고 좁은 논두렁길을 걸어 얼마를 가니 천곡교회가 나타난다. 교회에는 벌써 이 변변치 못한 나를 보러 온 사람이 수십 명이 된다. 나는 아지 못하게 가슴이 울렁거림을 느꼈으니, 어떻게 저분들의 기대를 잘 응답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 까닭이다.
교우 여러분이 손수 준비하여 주신 점심을 잘 먹고, 오후 두 시에 간단한 이야기를 한 후, 곧 영아부를 조직하고 진찰하니, 근 30명 아동이 찾아왔다. 산 속에서 의료기관에 굶주린 그들의 열심을 볼 때에는, 도시에서 문명의 혜택을 입으면서도 고마운 줄을 모르고 지내는 우리에게 비하여 느끼는 바가 많았다.
신선한 공기 맑은 물을 마음껏 값없이 마시고 있는 그들에게 무슨 병이 있으며 무슨 괴로움이 있으랴 그러나 서글픈 것은 아지 못하는 것이며, 배우지 못한 것이다.
금년 다섯 살 된 계집아이가, 어머니의 품속에 안기어, 고개도 못 들며 말도 통 못하며, 아무 의사도 발표치 못하고, 손과 발은 흔들거리기를 바람에 불리는 나뭇가지와도 같다. 그 신체 골격 그 무엇을 말하는가 그의 어머니는 40이 넘은, 아이 많이 낳은 부인인데, 유도가 부족한데, 아는 것은 밥물을 걷어 먹이는 것뿐이므로, 젖먹이 어린애에게 그 필요한 성분을 따라 먹일 줄을 알 이치 없다. 그는 덮어놓고 오늘까지 밥물만 먹였다. 이렇게 잘아난 그 아이는 살과 뼈가 굳지 못하여서 저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 지금 다른 것을 먹을 줄 알겠으며 운동할 수 있으랴. 수효도 부족하게 난 이는, 부슬부슬 무너져 떨어지는 흙덩이와 모래같이 되었다. 이를 미루어 그 신체 조직이 얼마나 연약한지 짐작할 수 있다. 유명한 의사가 서울서 왔다는 말을 듣고, 그 어머니는 행여나 무슨 희망 있는 말을 들을까 하고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여, 그의 가슴에 쓰라린 상처를 시원케 하여 줄 수 있을까? 나는 막막하여 동정의 한숨만 길게 내쉬었을 뿐이다. 저녁 때 다섯 시쯤 ‘둔터’ 라는 곳으로 10리를 더 가야 하게 되었다. 이때 밀러 부인은 먼저 인천으로 가시고 나는 황혼길을 천곡교회 목사 전도부인 이 간호원과 동반하여 걸어갔다“...

이렇게 조직된 영아부는 꼭 1년만인 1938년 5월 제 1회 수상식을 거행하였는데, 수상자 명단은 아래와 같다.
개근상 - 임영수, 홍석인, 홍석완, 홍인석, 주영월, 이성표, 김지선, 권정옥, 이종만
원거리 - 이한나, 방흥원, 김진섭, 김지선 (어머니들이 10리, 15리를 개천을 건너며 산을 넘어 열심히 다닌 성의를 표창하였다)
모범상 - 신학균

이 영아사업은 여자사업부의 전국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제천, 강릉, 영변과 함께 가장 모범적인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서 이 사업을 책임 맡은 이연순 전도사가 여자사업부 제 4 회 연회에서 보고까지 하게 되었다.

③ 전쟁 중의 교회
6.25 전쟁은, 한민족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동족상잔의 아픔만이 아니라 그 피해도 엄청난 비극인 사건이었다. 15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전비가 소요되고 사망자만 265만 명, 전쟁 재해민이 1,000만 명에 이르렀다. 수없이 많은 피난민으로 교회는 비어 있을 사이가 없었다. 그러다 미군 비행기의 공습과 공산학정으로 가정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 때 전재풍 목사는 가족들을 처가로 보내고 자신은 남아 있다가 공산당에 붙들리어 한 40여 일간 고생을 하였다. 그 해 겨울 9.28 수복과 함께 압록강 까지 밀고 올라갔던 국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음 해 1.4 후퇴를 하게 되었다. 공산학정을 맛보았기에 담임 목사와 함께 몇 가정은 공주 유구까지 피난을 갔었다. 남아 있는 성도들은 공산학정에 대한 두려움과 더욱 자주 일어나는 공습으로 인해서, 9.28 수복 이후 교회당에서 모이던 집회를 또다시 가정에서 모였다. 그러던 중 어느 주일, 낮 예배가 막 끝나갈 무렵에 찢어지는 듯한 제트기 소음과 함께 기관총 소리가 들려왔는데, 이웃집과 예배 드리던 장소의 건넌방과 마루가 총탄에 맞았다. 이로 인해 건넌방에 있던 피난민 3명이 부상을 당하였고, 예배 드리던 방안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무사하였다.

이 때, 교회당도 폭격을 맞아 화재에 휩싸였다. 한 시간 전, 정찰 비행시 누군가 두려워 교회당으로 뛰어 들어가는 바람에 폭격을 맞은 것 같다. 교인 가운데 일할 수 있는 이들이 교회당으로 뛰어갔다. 이미 붙은 불은 완전히 끌 수는 없었고, 아직 불길이 가지 아니한 부분에서 양철지붕을 뜯고 유리창문을 뜯어냈다. 최용신 양을 주축으로 해서 온 교회가 함께 1933년에 교회당 겸 학원으로 지었던 건물은 18년 만에 화재로 잃게되었다.

평택까지 후퇴했던 유엔군은 이른 봄에 다시 서울을 탈환하고, 그때서야 피난 갔던 목사와 교인들도 모두 돌아왔다. 감리교단에서 동란으로 인한 피해상황을 조사, 보고하도록 해서 복구비를 받아, 그 돈으로 그 자리에다 예배당을 짓게 되었다. 수원에서 젖은 나무를 사다가 기둥을 세우고 벽은 안으로 외를 엮고 밖이나 지붕은 구 예배당에서 뜯어낸 양철로 이어, 10칸 크기의 집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1952년 5월 11일 당시의 감리사였던 정등운 목사의 주례로 성전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또다시 세 번째 성전 건축을 이룩하게 된 것이었다.

④ 표창 받는 교회
샘골마을은 1930년대에 벌써 온 동리가 한두 집을 빼놓고는 다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래서 1931년 최용신 양이 오기 전, YMCA에서는 이미 그러한 사실로도 이 동리를 모범적인 동리로 생각하고, 지질검사도 하며 여러 특용작물을 비롯해서 축산을 장려하여, 더욱더 높은 수준의 동리와 교회로 이끌기 위한 작업을 하였었다. 이러한 때 최용신 양이 부임하였고, 그녀는 이러한 외적인 생활태도 위에 정신적인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동리와 교회의 성장은 일제하의 탄압 속에서도 계속되었고, 해방 후 신생활운동의 모범이 되었다. 온 동리가 기독교 신앙의 철저함으로 도박을 멀리하고,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바쁜 농번기 때면 작업반을 만들어 공동작업을 하고, 정초가 되면 양력과세를 일제히 하여 음력과세를 하지 아니하였다. 이러다 보니 경제적으로 나아져서 향학열도 불타 각 가정마다 자녀들을 학교에 진학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당시 나라에서는 6.25 동란으로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고 사회가 혼란한 때,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농촌의 이상적인 어떤 모델을 찾던 중, 천곡교회와 그 교회를 중심한 천곡 부락을 신생활 모범 부락으로 선택했다. 1954년 3월 사회부 장관 박술음 씨로부터 표창을 받게 되었는데, 그 수상은 김복희 사모가 받게 되었다. 그녀는 목사 사모로서의 훌륭한 내조는 물론 과거 독립 운동가였고, 또 최용신 양 이후 학원을 직접 맡아 운영해 왔으며, 해방 후에도 수원군 대한부인회 회장으로서 사회활동에 그 공이 컸기 때문에 대표로 상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표창은 천곡교회나 동리의 영광뿐 아니라 수원지방 내지는 감리교단의 자랑이기도 하였다.

이군석 목사 시대 (1954~1968년)

① 독립 구역이 되는 천곡교회
1954년 제암교회에서 이군석 목사가 부임해서 1955년에는 야목, 둔대 교회로 하여금 각각 담임자를 모시게 해서 세간을 내주어서 독립 구역을 만들어주었고, 1956년에는 반월마저 세간을 내주어서 천곡구역에는 천곡교회 하나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천곡교회는 한 교회로써 한 구역을 이루게 되었다.

이 때는 시기적으로 6.25 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끝나고 한참 전후 복구사업이 활발하던 때였다. “위기는 기회도 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6.25 전쟁은 민족적인 비극임에 틀림이 없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북에서 피난 온 수많은 교인들과 교역자들, 비참한 전화 속에서 얻어진 세상에 대한 실망과 또한 하나님에 대한 소망, 기독교 국가라고 일컬어지는 서양 우방인들의 희생적인 원조 등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로 몰리게 하였으므로 교회는 그 참화 속에서도 부흥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원 지방만 해도 1951년도에 8교회가, 1953년도에는 7교회가, 1954년도에는 3교회가, 1955년도에는 11교회가, 1956년도에는 8교회가 개척 또는 교역자를 초빙함으로써 독립구역이 되었다. 이러한 추세에 의해서 천곡교회도 한창 부흥도상에 들어섰다. 그래서 복구사업의 일환으로 원조된 기금으로 지은 10칸짜리 예배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② 네 번째 성전 건축
교회는 성전이 좁아 예배를 드릴 수 없을 정도로 부흥하여, 1960년 4월 20일, 네 번째로 성전 짓기
시작하여 1962년 4월 2일 오전 11시에 성대하게 성전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목수는 이문영 권사였
고, 건축물은 양회벽돌 벽에 양철지붕을 올린 것으로 건평은 54평 3홉 3작 이었다. 그 당시로는
수원지방에서 가장 잘 지은 건물이었으며 농촌교회당으로도 전국에서 손꼽을 만큼 잘 지은 것이
다. 그리고 오후 2시부터는 최용신 양의 추도예배를 드렸다. 이 성전은 이름은 붙이지 않았어도
최용신 양의 기념교회의 의미도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최용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보태어져 더욱 정성껏 짓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17평 크기의 주택을 주택을 지었다.
건축의 어려운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또 담임자인 이군석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이며,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의 눈물어린 협력과 봉사 때문이었
다. 이렇게 해서 천곡교회는 좋은 건물에다 많은 교인을 가지고 있고 최용신 양이 일하던 교회라
는 이름 때문에 모든 이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교회가 되었다.

③ 샘골 고등농민학원 개원
1954년 전재풍 목사가 사임하고 이군석 목사가 부임한 후 초기에는 학원이 과거에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 다시 재건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 이유는 장소와 선생의 문제 때문이었다.

이 때의 샘골은 다른 농촌 부락보다 앞서 가는 곳으로, 기독교 정신에 의한 근면과 자립 정신으로 열심히 일하여 땅을 사고 교육에 투자하였다. 그래서 다른 동리보다도 매 호당 땅을 제일 많이 가졌고 집집마다 대학생이 없는 가정이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기독교적인 영향과 교육의 결과, 이상촌을 건설하려는 몇몇 청년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모두 중앙신학 동창인 이군석 목사의 장남인 이승제(李昇堤), 샘골 태생인 임영수(林永洙), 둔대리교회 출신인 김우경(金禹經) 등이었다. 이들은 수차에 걸쳐 의논한 결과 학원 문을 다시 열기로 합의하고, 교회 임원회에 제의하여 결의를 본 다음 1960년 3월 10일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학원은 오랜 동면 끝에 깨어나게 되었다. 학원 이름은 “샘골고등농민학원”이었고 초대 원장에는 홍천유(洪千裕) 장로, 교사로는 김우경, 임영수, 최기영 제씨였다. 시간은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였고, 입학자격은 국졸 이상, 과목은 일반 중등과정에서 축산, 농업이 추가되었고 연한은 2년제로 3년 과정을 모두 마치게 되었다.

학생으로 첫 해에 26명이 입학하였다.
이때의 학원 운영은 순전히 선생들의 열의만으로 되었다. 수업료는 받지 않은데다 교회도 예배당을 건축 중이라 전혀 보조가 없었다. 학생들에게는 등화비로 20원씩을 받았을 뿐이었다. 선생들은 하루 종일 일터에서 수고하다가 저녁때가 되면 늦을세라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이 뛰어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2년 제 1회 졸업생을 26명 내기까지 어렵지만 그럭저럭 운영해 왔으나, 그 해 7월 국제 웍캠프가 샘골에 오면서부터 어려운 일이 생기었다. 반월공립중학의 학생모집에 지장을 주어서인지는 몰라도 교육청으로부터 정식 인가 요구를 받았고, 결국 그 해 5월 학원의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이사회를 처음으로 구성하였다.

(이사장: 김학준 , 이 사: 안종헌, 홍찬의, 홍천유, 홍석필, 송창건, 황에스더, 길금복, 홍우준, 김우경)

제 3대 원장으로 이군석 목사를 선출했고, 학원 인가를 위한 여러 방도를 모색해 보았으나 학원 인가를 낼 만큼 조건이 구비되지 못하여 결국 1963년 5월에 감리교단이 운영하는 ‘웨슬레 구락부’로 편입시켰다. 웨슬레 구락부는 1954년 선교사 제프리 목사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9 세부터 15 세까지, 수업 연한은 2 개년, 1인당 교사 1인을 기준으로 매월 2 천원씩 보조하였다. 1960년 말 당시 전 감리교회의 약 1/4인 233개 교회에 이 구락부가 조직되었고, 학생 1만 3천명, 교사 400 여 명이나 되었다.샘골농민학원은 인가문제로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어 늦게나마 웨슬레 구락부에 편입되어, ‘샘골 웨슬레 농민학원’이란 이름으로 1970년 상록재건중학교로 되기까지 7 년간을 운영해 왔다. 이 기간의 졸업생 및 교사 현황은 아래 도표와 같다.

④ Y.W.C.A와의 자매결연
1960년 3월, 김우경 선생 외 몇몇 청년들의 힘으로 2년 동안 3년 과정을 마치는 “웨슬리 농민학원” 이란 이름으로 다시 학원의 문이 열렸다.
그 해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어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혁명정부가 들어선 후 소위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재건본부 생활 분과위원이었던 장돈식 장로를 만나 학원의 사정을 말하고 도와줄 수 있는가를 상의하니, 처음에는 도와줄 터이니 젖소를 키우든지 아니면 양계를 해 보라고 하였다. 그때 장돈식 장로는 주 안에서 크게 양계사업을 하면서 달걀을 군납하던 시기였다.

이 사업을 위해서는 교회가 조합을 조직하고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좀 어렵게 생각되던 차에 장돈식 장로가 불러서 가보니, “요즘 자매결연 사업이 한창 시행되고 있는데, 자매결연을 맺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여 그것이 좋다고 하니, 회사와 자매결연을 맺으면 물질적인 원조가 있어 좋겠지만 우리는 교회이고 또 과거 Y.W.C.A와도 관계가 있었으니 Y.W.C.A와 자매결연을 맺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Y.W.C.A 역시 과거의 역사도 있고 해서 천곡교회의 이러한 요청을 쾌히 승낙하였다. 이렇게 해서 Y.W.C.A와 자매결연을 맺게 된 것이다.
1962년 4월 2일 성전봉헌식을 마친 후 교회 마당에서 Y.W.C.A와 자매결연식이 있었다. 이때 라디오 1대, 한우 3마리, 돼지 10여 마리, 헌금 40여만 원을 동리에 전달하여, 가축은 동리 사람들이 나누어 길렀고 돈으로는 방앗간을 사서 운영하였다. 꼭 30년 만에 또다시 Y.W.C.A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YMCA와의 자매결연

1960년 3월, 김우경 선생 외 몇몇 청년들의 힘으로 2년 동안 3년 과정을 마치는 “웨슬리 농민학원” 이란 이름으로 다시 학원의 문이 열렸다. 그 해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어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혁명정부가 들어선 후 소위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재건본부 생활 분과위원이었던 장돈식 장로를 만나 학원의 사정을 말하고 도와줄 수 있는가를 상의하니, 처음에는 도와줄 터이니 젖소를 키우든지 아니면 양계를 해 보라고 하였다.

그때 장돈식 장로는 주 안에서 크게 양계사업을 하면서 달걀을 군납하던 시기였다. 이 사업을 위해서는 교회가 조합을 조직하고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좀 어렵게 생각되던 차에 장돈식 장로가 불러서 가보니, “요즘 자매결연 사업이 한창 시행되고 있는데, 자매결연을 맺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여 그것이 좋다고 하니, 회사와 자매결연을 맺으면 물질적인 원조가 있어 좋겠지만 우리는 교회이고 또 과거 Y.W.C.A와도 관계가 있었으니 Y.W.C.A와 자매결연을 맺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Y.W.C.A 역시 과거의 역사도 있고 해서 천곡교회의 이러한 요청을 쾌히 승낙하였다.

이렇게 해서 Y.W.C.A와 자매결연을 맺게 된 것이다. 1962년 4월 2일 성전봉헌식을 마친 후 교회 마당에서 Y.W.C.A와 자매결연식이 있었다. 이때 라디오 1대, 한우 3마리, 돼지 10여 마리, 헌금 40여만 원을 동리에 전달하여, 가축은 동리 사람들이 나누어 길렀고 돈으로는 방앗간을 사서 운영하였다. 꼭 30년 만에 또다시 Y.W.C.A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6 1967 1968
졸업회 - - 1 2 3 4 5 6 7
졸업생 - - 26 23 31 29 11 249
교사 이군석
홍찬의
김우경
임영수
최기영
이군석
홍찬의
김우경
임영수
최기영
이군석
홍찬의
김우경
임영수
김영식
임인숙
이승제
이군석
홍찬의
김우경
임영수
김영식
임인숙
이군석
홍찬의
김우경
임인숙
이군석
홍찬의
김우경
이군석
홍찬의
김우경
이군석
홍찬의
김우경
홍석만
이기덕
김우경
홍석만
조종순


※ 이 글은 주로 홍석창 목사님의 저서 <상록수 농촌 사랑>, <수원지방의 발자취 - 수원지방 70년 역사>와 목사님의 미공개 논문 등을 저자와의 동의 하에 인용하였습니다.

1968년 이군석 목사가 정년으로 퇴임하고 이기덕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한 그 이듬해 2월에 루씨 동문회와 힘을 합쳐 학원 인가 추진하였다.
( 위원장: 이기덕 목사 , 위 원: 홍찬의, 홍천유, 홍석필, 김우경/교회, 최직순, 최경자, 이재숙/동문 )

이 추진위원회는 기술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샘골농업기술학교로 인가를 얻으려고 하였다.
1969년도 제 9기생 모집요강을 보면, 인원: 50명(남, 여), 입학지원자격: 초등학교 졸업자 및 동등의 학력을 가진 자, 수료기간: 2개년, 연령: 14-20세(30세까지 가능), 과목: 농업, 성경, 영어, 국어, 음악, 수학, 생물, 과학, 지리, 역사, 가사, 축산, 축산 병 등과 같다.

1970년에 들어와서 아직 인가를 얻지 못했지만 장차 얻을 것으로 믿고 우선 야간을 주간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름을 상록재건중학교로 바꾸었다. 그러나 아직 인가를 얻지 못한 데다 수업시간을 낮으로 옮긴 관계로 학생모집이 어렵고, 선생들도 일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계문제로 일하기가 어려워 애석하게도 1971년에 또다시 문을 닫고 말았다. 이 기간 동안의 졸업생 및 교사 현황은 다음과 같다.

살림나는 교회 이기덕 목사 (~1975년)

1968년 1월 25일 구역회에서, 박용목 감리사에게 소반월(현 반월중앙교회)과 부로지(현 부암교회)에 지교회를 설립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부로지 교회는 설립을 허락됨과 동시에 교회당 설립자금을 지방회에 건의하기로 하고, 소반월에 대해서는 현지답사를 한 후 결정하는 것으로 보류하였다. 양 지역은 모두 천곡교회로부터 2km 이상 3km 미만이 되는 곳으로써, 농촌지역으로 볼 때 지교회를 안 세워도 무방한 곳이었다. 그러나 천곡교회가 교회당과 주택도 지었으며, 재정적으로도 교회를 하나 세워 살림 내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번에 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좀 벅찬 일이었다. 1968년 5월 19일 모인 임시구역회에서 부로지교회에 윤무병 전도사를 담임 전도사를 파송하고, 담임자 사례비로 교회에서 3천원, 홍찬의 장로 개인이 2천원(계 5천원)을 보내다가, 1971년 6월 27일에 소반월을 포함해서 부로지교회를 독립 구역으로 10여 가정을 아주 살림을 내주었다. 그리고 초대 담임자로 이복례 전도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소반월 지역의 임원은 장로 1인, 권사 3인, 속장 7인, 유사 4인, 탁사 2인으로 천곡교회 임원회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였다. 숫자만이 아니라 역사나 경제력도 상당하였다. 따라서 소반월지역의 독립은 천곡교회로서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한꺼번에 두 교회의 독립은 할 수 없다는 취지 아래 지교회 설립이 보류되니, 1968년 신임 목사의 부임과 동시에 따로 모이기 시작함으로, 결국 동년 5월 19일 박용목 감리사의 사회로 임시구역회를 열어 정식으로 소반월에다 지교회를 세우자는 결의를 하고, 기성교인은 자유로 하되 새 신자 전도에 한해서는 앞으로 3년간은 현재의 구역인 각골, 작은 반월만을 선교구역으로 하기로 하였다. 담임자는 한 달에 한 번씩 예배를 인도하며, 소반월교회에서는 의무금을 천 원씩 부담하면서 1971년 6월까지 내려오다가, 7월부터 독립 구역이 되었다. 그리고 초대 담임자로 안준환 전도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이 때에 살림난 교인은 입교인만 30여명이었다.

배옷(현 본오교회)도 거리나 교인실력으로 봐서 독립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미리부터 준비를 하였다. 1970년 9월 20일 본오리 605번지에 있는 회관을 8만원에 구입하고 교회학교부터 시작하였다. 1975년 10월 25일 임원회의에서 지교회 설립안이 이승철 권사에 의해서 의견이 제안되고, 받아들여져 1년간 연구, 검토하기로 하였다. 그 후 꼭 1년만인 1976년 9월 19일 70주년 행사를 마치고 나서 열린 임원회에서 오목골은 공동 선교지역으로 하고 독립할 것을 담임자가 발표함으로써 독립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976년 12월 2일 설립구역회를 열면서 정식 발족하게 되었다. 이때에 살림나게 된 가정 수는 30가정이 되며 원입인 130명, 세례아동 5명, 학습인 10명, 세례인 4명, 입교인 49명으로 모두 198명이었다. 그리고 초대 전도사로는 박용대 전도사가 부임하였다.

1976년 반월 신공업도시 건설계획이 발표된 후, 반월 제 1성호동 지구 (1리 이주단지)가 조성되어 각처에서 이주민이 늘어나자, 그곳에도 교회를 세울 만한 위치가 되므로 1980년 12월 21일 당회에서 개척교회를 세우기로 하여, 1981년 3월 15일 김우경 권사 가정 외 18가정을 묶어 벧엘교회로 살림을 내고 초대 목사로 이승식 목사가 부임하였다. 이렇게 해서 천곡교회는 1970년대에는 무려 100여 가정이 나가서 4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살림난 교회 중 모교회보다 더 큰 교회가 되기도 했는데, 마치 살림 내준 부모는 살림 내주느라 적어지고 살림난 자녀들은 더 잘사는 격이 되었다.

샘골에서 살림을 난 지교회
지교회명 부로지
(현 부암교회)
소반월
(현 반월중앙교회)
배옷
(본오 교회)
벧엘교회
개척년도 1968년 1968년 1976년 1980년
지역 상록구 부곡동 상록구 본오 2동 상록구 본오1동 상록구 이동 550-1
초대담임자 윤병무 전도사 이복례 전도사 박용대 전도사 이승식 목사
이적가정   16 가정 30 가정 19 가정

연도 횟수 졸업생수 교사현황
1969 8 13 이기덕, 김우경
1970 9 11 이기덕, 조종순, 주수남, 홍석현, 홍수현
70주년 기념 예배(1976년) - 김진춘 목사

김진춘 목사가 재임했던 기간(1975년-1981년) 교회는 반월 신공업도시 건설계획으로 인하여 대단히 뒤숭숭한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토지나 집을 버리고 이주해야 한다는 아쉬움, 장래에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한 염려로 인해 교인들의 마음은 들뜨기 시작하였다. 김진춘 목사는 샘골에 부임한지 꼭 1년이 지나 발표된 이 신도시 건설계획으로 인해 이임하기까지 6년간 계속 이런 문제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시대적인 요청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임자인 이기덕 목사가 신앙부흥을 위해 전력을 했다면 김 목사는 교회의 사회적인 사명을 강조하는 방향의 목회를 하였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1976년 9월 16일에 있은 교회창립 70주년 행사를 두고 볼 때, 그때는 아직 발표 직전인 것을 감안하면, 그의 본래의 목회이념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리고 그런 목회이념이 반월 신공업도시 건설 발표로 더욱 그런 방향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그는 부임한 후 6개월 동안은 교회의 여러 가지 동태를 파악한 후, 자랑스러운 교회의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1976년 3월 28일 임원회에서 7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경비 536,160원을 들여 70주년 행사를 하였다.

◆ 70주년 기념 예배
- 기도 : 이기덕 감리사
- 설교 : 박설봉 감독
- 교회 연혁보고 : 홍찬의 장로
- 기념패 수여 : 김창회 감독, 홍석필 장로
- 축사 : 유기환 감리사
- 축도 : 김창회 감독

아울러, 행사를 마친 날 밤 임원회의에서 1년 전에 약속한 대로 본오교회를 살림 내주었고, 성호단지가 세워져 주민이 몰려들자 장차 어느 교파든지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샘골과 거리는 가깝지만 벧엘교회를 세웠다(1981).

반월신도시 개발과 교회 보존 노력

반월 신공업도시는, 1976년 7월 서울의 소산(疏散)공장을 수용할 수 있는 적당한 지역을 선정하라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건설부가 동년 9월 21일 반월지구를 적지로 선정, 대통령의 재가를 받음으로써 태동되었다. 정부는 동년 10월 2일 기준지가 고시 및 반월 신공업도시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동년 12월 4일 도시계획구역 및 개발제한구역을 결정 고시하고, 24일에는 반월 신공업도시 개발 지원업무에 관해 경기도와 산업기지개방공사간에 위수탁협약을 체결하였다. 1976년 12월 31일에는 반월 도시개발 지원사업소 설치 조례를 공포하고, 다음해 1월 11일자로 시흥군 군자면 거모리에 지원사업소를 개소하여 용지 매수업무를 비롯 보상 이주 대책업무를 추진해왔다.

이렇게 됨으로 해서 천곡교회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유지재단 소유 1,981평과 최용신 사업을 위한 땅, 홍석필 외 2인의 이름으로 된 1,391평이 최용신 기념사업으로 보존될 여부가 확실하지 못하게 되자, 1979년 2월 24일 최직순 외 루씨여고 동창생 대표 7명 및 천곡교회 김진춘 외 4명의 이름으로 건설부 및 청와대 비서실로 진정서를 보냈다.

이렇게 하여 천곡교회의 일부는 어렵게 보전되었으나, 최기 교회 자리에 세워진 상록학원은 이설되어야 했다. 이에 최 용신 양의 모교 루씨 동문회에서 1982년 11월 상록학원 보전을 산업기지개발공사에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이 후 1983년 최 용신양의 묘역만이라도 공원으로 편입시켜 달라는 요청도 거절당하였다. 1985년 루씨유아원은 대지 1천4백평, 건평 50평에 대한 보상금을 수령 받았으나, 천곡교회의 공원에 수용된 토지 1,050평에 대한 보상금 6,148만원을 수자원공사가 지급하려 했으나 교회가 수령을 거부하여 수자원 공사는 보상금을 법원에 공탁하게 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87년 6월 천곡교회는 더 이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공탁금을 수령함으로써 교회는 공원에 수용된 토지 1,050평에 대한 법적 권리를 잃게 되었다.

<천곡교회 진정서>
건설부 장관님
새마음 갖기 운동본부 총재님

1. 청원제목 : 최용신 유적지 원형보존 및 유업 승계 활동을 위한 행정 지원
2. 청원배경 :
1)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 선생이 활동하던 유적지(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4리 75번지 일원 3 천여 평) 위에 기념관, 교회, 기념비, 묘소가 보존되어 있어,
2) 뜻있는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찾아와서 경천, 애국, 충효의 얼을 배우고 있으며 지역 내 국민학교는 최용신 연구학교로 지정이 되어있어, 유적지 일원이 새마음 가짐을 위한 현장교육의 터가 되어 왔습니다.
3) 뿐만 아니라 선생의 제자들과 동조자들 그리고 루씨 동문회가 힘을 모아서 얼을 계승하기 위한 사업계획을 다방면으로 연구하면서 부녀자를 위한 야간학습과 어린이들 정신지도를 위해 크게 노력해 오고 있었습니다.
4) 그러던 중 반월공업도시 계획이 발표되므로 유적 및 유업의 존속여부를 놓고 염려하던 중 당국의 흔쾌한 배려로 이 지역이 보존되기로 결정됨으로써(한국일보 1977년 6월 15일자 서울란) 사회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뜻있는 이들이 기뻐하고 당국의 결정을 감사히 여겨왔습니다.
3. 당면문제 :
1) 그런데 도시화 작업이 진전되면서 업무를 관장하는 산업기지 개발공사의 방침을 보면 유적지일원을 전면 매수할 계획인 것으로 보이며,
2)공사상의 편의를 중심으로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혹 보존키로 지정된 유적지 일원뿐만 아니라 지상물 일체가 원형보존이 어려울 전망이 보이며,
3)그런 뒤에는 행정절차상 재산 및 관리관계 등 일체 권한이 국가에 귀속하게 될 전망인 바,
4)유적지의 원형보존과 유업의 승계를 위해서 각 방면으로 애쓰던 유지와 동창 및 제자들의 뜻을 실현키 어렵게 되는 전망입니다.
4. 청원내용 :
1) 보존키로 결정된 본래의 내용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태발전이 이뤄지고 있으므로, 행정적 매수 절차를 밟진 않아도 이미 폐쇄적인 사유재산이 아니고, 공원 내지는 공기관으로서의 성격으로 존속해 오던 본 유적지를 매수 계획에서 제외시켜주시기를 청원합니다.
2) 매수 계획에서 제외 조치를 해주시면 도시개발계획에 적극 협조할 것이며, 도시형성 이후 공원으로서의 지역성격을 살리는 데 당국과 크게 협조할 것이며, 최용신의 유업을 승계하여 경천, 애국, 애족의 얼을 크게 신장시킬 것입니다.

1979년 2월
기독교 대한감리회 천곡교회 목사 김진춘, 장로 홍찬의 장로 홍석필 장로 홍천유 장로 민억기

<건설부 회신 공문>
건 설 부 (1979.2.26) / 도정 125-3998
수신 수신처 참조
제목 진정서 회신

1. ‘79.2.24일 귀하가 당부에 제충한 진정서에 관한 회신입니다.
2. 윗건으로 제출하신 진정서는 내용 검토한 바 반월신공업도시 건설사업시행자인 산업기지개발공사에서 처리할 사항이므로 별첨공한 사본과 같이 동사에 이송하고 그 처리 경과를 귀하에게 회신토록 하였으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첨부: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 앞 공문사본 1부. 끝.
건 설 부 장 관 수 신 처: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경남아파트 3동 202 최직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사리 천곡교회 김진춘

<산업기지개발공사 회신 공문>
산업기지개발공사 (1979.5.26) / 도계 125-5343
수신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4리 75 천곡교회 김진춘
제목 진정서 회신

1. 도계 125-1871(79.3.3)의 관련입니다.
2. 귀회에서 진정하신 건에 대하여 당 공사에서는 도시계획 위치를 변경하여 고 최용신 양의 사회봉사 활동을 기리기 위한 기념적 건물의 현지 보존을 도모하고자 건설부에 도시계획 변경 신청을 하였음을 기 통지한 바 있습니다.
3. 본 신청에 대한 도시계획 위원회에서 심의 결과 별첨과 같이 도시계획 공원이 확정되어 79.5.20 도시계획 변경 고시가 되었으니 양지하시기 바라오며, 교회 등 일부는 존치되오나 상록학원은 구역 내에 이축되어야 함을 알려드리오며,
4. 국가 백년대계를 위하여 반월 신공업도시 건설사업에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이 속회와 교회학교의 부흥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어린이 속회가 조직,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샘골고등농민학원과 교회 청년부에서 교육받은 열정적인 교사들의 헌신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평일 저녁에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은 일을 마치고 식사도 못한 채 속회로 달려갔고,한 속마다 어린이들이 3, 40명씩 모여 예배와 성경공부를 할 만큼 속회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당시 어린이 속회는 성포동속, 오목골속, 본오속, 삼리속, 석호속, 일리속, 이리속, 샘골속으로 구성되었고, 속을 이끌던 교사들은 민경일, 홍세철, 홍희숙, 박금순, 이영순, 최정숙 등이었다.

어린이 속회의 부흥은 곧 아동부의 부흥으로 이어져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 샘골 교회학교 아동부는 150명 이상,180명까지도 모이는 대단한 부흥을 이루게 되었다.이 무렵에 지교회가 독립해 나가면서 성인 교인의 경우, 재적에 숫자상의 증가가 거의 없었음과 비교하면 교회학교의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 어린이 속회 활동은 1976년의 신도시에 대한 정부 발표 이후 원주민 택지가 조성되고 샘골 주민들이 이주하여 마을이 완전 철거되는 1985년까지 지속되었다.

※ 이 글은 주로 홍석창 목사님의 저서 <상록수 농촌 사랑>, <수원지방의 발자취 - 수원지방 70년 역사>와 목사님의 미공개 논문 등을 저자와의 동의 하에 인용하였습니다.
교회 부지 환수

천곡교회의 주변이 고밀도 주거 지역으로 발전함에 따라, 교인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으나 예배당이 작아 교회는 증축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교회 부지의 대부분이 상록수 공원에 수용되었고, 주변이 공원지역이었기 때문에 교회는 더 이상 증축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교회 부지 반환 요구의 움직임은 새로운 목회자 기수철 목사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일게 되었다.안산시는 공원 부지를 수자원 공사로부터 소유권을 이관 받고 1988년 상록수공원화 계획을 발표하고 공원 내에 있는 1960년대에 개축된 교회건물을 철거하겠다고 통보하여 왔다.

이에 교회는 시와의 협의에서 1)교회 부지의 반환, 2)교회 증축 허가, 3)소방서 부지의 대토의 3개 안을 제시하였으나 그 해 7월 시로부터 도시공원법 시행령 제6조 제6호 및 제7조 제2호 바목을 들어 교회 증축을 불허하고 이주 택지를 분양 받아 이전할 것을 종용하였다. 시에 수 차례의 요구가 별 진전이 없게 되자 교회는 1991년에 건설부에 증축승인을 진정하였고, 건설부로부터 새로운 대지 조성이 없는 조건으로 증축을 허용한다는 회신을 받게 되었다.

(도시 공원법 시행령 제6조 11의 2 및 제7조 2호 아목에 의거, 새로운 대지 조성을 수반하지 않는 경우, 기존시설의 연면적 범위 내에서 증축을 허용함)
그러나 안산시는 교회 증축의 불허와 함께 교회 건물의 철거를 통보해 왔다.(1991.10.14) 이런 와중에 최 용신양의 묘역은 안산 향토 유적지 제 18호로 등록되었고, 시에서 추진하는 공원화의 공사도 진행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 조 건호 안산시장(1992.1~93.1)은 안산문화원에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해 줄 것을 요청하여 안산문화원은 5개 항의 합리적인 안을 제안하게 되지만, 후임 김 태수 시장에 의해 무시된다.

<안산문화원의 상록공원화 5개항>
① 김학준 묘 이장
② 공원 절개지 급 경사부 완만하게 할 것
③ 인근 지역의 땅을 매입하여 공원 부지 넓힐 것
④ 교회 건물 3층 건축 대신에 현재의 지상 1층, 지하 2층으로 함
⑤ 루씨 유아원을 옛 샘골 강습소 원형으로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사용

안산시는 이전의 공원화 작업을 강력히 추진, 교회 증축불가를 통고(안산시 공문 1993.7.28)하고, 그 해 8월에 상록수 공원(4,064평)을 향토 보호구역으로 지정 고시하였다. 이듬해 철거대상 시설을 94년 2월 15일자로 철거한다고 통고하였다.

- 대상건축물: 교육관, 사택, 창고, 화장실 - 대상시설물: 파고라(철재), 교회안내용 석조물, 기타 지장 시설물
이러한 시의 강제적 철거에 대하여 우리 교회의 성도만이 아니라 안산시의 역사적 유적지가 훼손되는 것을 아쉬워하는 안산시 사회단체들의 거센 반발에 따라 안산시는 범시민 공청회 요구에 응하게 되었다.

<상록수 공원 조성관련 범시민 공청회>
-일시: 1994. 5. 4
-주관: 안산사회 발전연구소(소장 김 충렬)
-장소: 안산시 고잔동 소재 장은문화회관
-참석: 안산시청 황인표 녹지과장, 임종호 문화공보 담당관, 종 흥윤 한양대 민족학 연구소장, 유천형 안산문화회장, 사회단체 안산사회발전연구소, 임 홍무 이사장, 신군식 상록수 회장, 호금옥 안산 Y.W.C.A총무, 기수철 천곡교회 목사, 임복규 태영아파트 대표 등 3백여 명

(발언 내용)
- 기수철 목사 기조연설 - 상록 공원에 관한 각계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여 역사적 긴 안목으로 재설계 개발함이 바람직하다.
- 임종호 문화공보담당관 - 상록공원계획은 최용신 선생의 업적을 고려하여 심도 있게 논의되었고 복원은 문화원과 한양대의 자문을 얻어 복원할 계획임.
- 황인표 녹지국장 - 상록공원 계획은 1976년에 결정되었고 88년 2월 공원조성계획이 수립되어 93년 12월 착공, 94년 8월 준공할 예정이었으나 교회와의 마찰로 공사가 지지부진한 상태로 현재 지장물 철거 정도만 시행했음.
- 조흥윤 한양대 교수 - 상록수 정신 계승을 단순한 문화보전차원으로 생각지 말고 좀 더 발전적인 차원의 사업 계승으로 다루어야 한다.
- 신군식 상록회장 - 도지사에게 새로운 계획을 올려서 재검토를 촉구해야 함. 천곡교회를 배제한 공원개발은 무의미함.

공청회를 통하여 시의 상록수공원 계획이 수정에 대한 요구가 단지 교회만이 아니라 전 안산지역의 주민의 뜻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가 서울대 유달영 교수, 유천형 안산문화원장 등이 김 태수 안산시장을 면담한 자리에서, 시 중심이 아닌 교회 중심으로 공원계획으로 선회하라고 설득하였고 안산시는 교회를 철거하지 않고 상록수 공원 조성사업을 오는 8월 6일까지 완료하고 공원조성단계에 유적지 복원문제를 교회와 협의하여 교회 철거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안산시는 최 순식 시장에 들어와서 천곡교회 증축해 유적지로 보전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여 의회 승인을 얻었다.

다섯번째의 성전 건축
이러한 어려운 시기를 거쳐 결국 우리교회는 안산시청으로부터 잃어버린 대지 1050평중 340평을
1996년 3월 환수받게 되었다. 잃어버린 부지의 환수까지는 사회적인 여론이 많은 역할을 했지만,
성도들의 기도와 열심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수철 목사님을 비롯하여 많은 성도들이 새벽
예배를 마치고, 이스라엘 군사들이 여리고성을 돌았던 것처럼, 옛 상록수 공원을 일곱 바퀴씩 돌
며 하나님께 성전회복을 간구하였다. 또한 안산시가 대화를 거절하고 공원 공사를 돌입하였을
때, 많은 성도들이 공사장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공사 진행을 저지하였고, 일부 성도는 진행을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포크레인의 포크 안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결국 안산시는 공사 진행
을 더 이상 못하고 대화에 나와 대지 환수의 결과까지 얻게 되었다.
군사 정부시절, 정부와의 투쟁은 감히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이었으나,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잃었던 땅의 찾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5번째의 성전인 현재의 예배당을 건축하여 1998년 11월에 봉헌하게 되었다.
(건평 550평, 지상2층, 지하 2층) 교회 건물을 헐고 다시 지을 때까지 소방서 뒤 건물 지하를 얻어
2년 동안 어렵게 교회를 운영하여야 했다. 비좁은 예배당을 교회학교와 장년부 예배를 드려야했
기에 새 성전에서의 첫 예배에 대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교회 이름의 변경
초기 교회의 이름은 행정구역의 이름을 딴 사리(四里)교회였으나 1929년에 샘골로 불리웠다가 1932년 10월부터 샘골이란 지역명을 한자화한 천곡(泉谷)교회로 오랫동안 사용하여 왔다. 교회 부지의 환수 및 새로운 성전의 건축으로 인하여 교회 이름의 회복을 열망하는 성도들이 많아 1998년 임원회를 통하여 교회 이름을 샘골교회로 변경하기로 결정,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외선교지 개척

샘골교회는 지난 100년의 역사 동안 안산의 어머니 교회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 내어 왔다.
지교회들을 분리, 독립시키며 안산 지역의 복음화에 커다란 역할을 해 온 것이다. 지역선교를 위한 이러한 적극적인 교회의 분리는, 독립한 교회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때로는 모교회보다 더욱 크게 성장하여 훌륭히 복음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으로 큰 보람과 긍지를 느끼게 한다. 샘골교회는 지금도 이러한 지역선교와 모교회로서의 모범이 되기 위해 지방회와 각종 지방사업, 구제활동에 앞장서 참여하고 있고, 3.1절 연합예배의 유치와 최용신 기념예배 등 우리 교회의 뿌리깊은 애국계몽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20여개의 미자립 교회를 도움으로써 모교회의 전통을 현재로 잇고 있으며, 특별히 올해는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해외 선교로 선교의 범위를 넓혀 가는 가운데 베트남에 ‘샘골 케응아이’ 교회를 개척하였다.

※ 이 글은 주로 홍석창 목사님의 저서 <상록수 농촌 사랑>, <수원지방의 발자취 - 수원지방 70년 역사>와 목사님의 미공개 논문 등을 저자와의 동의 하에 인용하였습니다.

1934년에 전재풍 목사를 천곡에 모시면서 안산은 분구역 되어 안산 동, 서구역이 되었는데, 그때 천곡은 안산 동구역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7년에 이천국 목사가 부임하면서 천곡구역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의 천곡교회는 안산 동구역의 중심 교회로서, 기술한 바와 같이 큰 부흥을 가져오던 때였다. 김순봉 전도사, 장명덕 전도사, 최용신 양 등의 활약으로 8칸 크기의 교회당에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차 예배드렸고, 천곡교회의 중심 동리인 천곡 동민 30여 호 중 한두 집만 빼고는 모두 인가귀도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교회는 교계나 사회적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전재풍 목사 (1934~1937, 1939~1954)

전재풍 목사는 1887년 12월 12일 (음력) 서울 인사동에서 당시 중추원 의관이었던 부친 전승업 씨와 모친 서씨 부인 사이에서 4대독자로 출생하였다. 6세 때부터 글방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한 10여년을 배운 후, 외국어학교 불란서어 과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12월 21일 5명의 졸업생과 함께 제 7회로 졸업하였다. 1920년 준회원에 허입하고 1926년에 정회원이 되었는데, 그가 일생동안 역임한 교회를 보면 자교(1916-1918), 금화(1918-1920), 광희문(1920-1922), 개성남부(1922-1923), 원산중리(1923-1924), 고성(1924-1926), 김성(1926-1930), 평강(1930-1931), 철원(1931-1932), 장단(1932-1934), 천곡(1934-1937), 홍성(1937-1939), 천곡(1939-1954), 군자(1954-1956), 도일(1956-1959) 교회 등이며, 1957년에는 은퇴하고 1966년에 소천하였다.

전재풍 목사의 가정을 보면, 1925년 3월 김복희 여사와 결혼하여 자녀 6남매를 두었다.
전재풍 목사는 성격은 급한 편이지만 늘 바르게 처신하였으며 또한 부지런하며 깨끗하였다. 사람들을 잘 사귀어 친구가 많았으며, 특별히 글씨를 잘 써서 신학교의 졸업장을 써 줄 정도였다. 그리고 책이 많기로 유명해서 웬만한 작은 교회에서는 책 보따리를 다 풀어 놓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김복희 사모
김 복희 사모는 1901년 음력 10월 20일, 충청남도 아산군 백암리 구미동에서 부친 김윤필 씨와 모친 박씨 사이의 3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공주지방의 여선교사 사애리시(Mrs. Alice H. Sharp)의 천거로 이화학당 교비생으로 입학하여 191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제 1회로 졸업하였고, 1921년 3월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보육과를 제 3회로 졸업했다. 1922년 4월 충남 강경읍 황금정 유치원 설립 근무, 1924년 4월 충남 공주읍 대화정 유치원 근무, 1928년 강원도 김성읍 교회내 유치원 설립 근무, 1930년 강원도 평강읍 교회내 유치원 근무, 1934년 천곡 교회내 근무, 1937년 충남 홍성읍 교회 내 유치원 근무, 1964년 인천 숭의교회내 탁아소 설립, 1965년 숭의교회 내 숭의유치원을 설립 근무하였으며, 1967년에는 인천 서지방에서 장로로 피택되어 1980년 원로장로가 되었다.
김복희 사모가 천곡교회에 끼친 공헌은 목사 못지않게 대단한 것이었다. 학원 선생으로서 또는 해방 이후 대한부인회 회장으로서 한 활동 등은 어느 누구도 남길 수 없는 사회에 대한 위대한 공헌이었고 또한 목사 사모로서 교우들에게나 교회에 끼친 공헌은 더욱더 위대했다.
인자하고 부지런하며, 헌신적이며, 적극적인 활동 그리고 나라를 위하는 일, 기도 많이 하는 일 등은 사모로서 누구라도 따라올 수 없는 훌륭한 신앙과 인격과 생활이었다. 아마도 모든 사모의 사표가 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장명덕 전도사 : 1929~1939
1901년 9월19일 경기도 부천시 소래면 무지리에서 아버지 장선봉씨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14년 미감리교 한국여선부에서 운영하는 인천 영화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22년 4월 협성여자신학교를 입학, 1925년 졸업 후 상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밀러선교사는 장명덕의 능력을 높이 사, 삼일여학교 성경교사로 초빙되어 재직하였고, 1929년 4월 천곡교회 교사로 파송 받았다. 당시 안산구역 담임목사는 김홍제 목사이었다. 장명덕은 천곡교회로 오자마자 교회광고를 통하여 30명의 어린이를 모아 한글, 산수, 찬송가를 가르쳤고 상록수 천곡학원(샘골학원)의 시작이다. 장명덕의 활동이 밀러선교사에게 전해지면서 천곡학원을 모범적인 강습소로 정하고 지원을 계속하기로 하였고 최용신이 합류하게 된다. 그 후, 밀러선교사와 함께 1937년 ·수원지방 여선교회 협동총무로 함께 일을 하다, 1939년 4월 인천 화도교회 전도사로 파송받아 천곡교회를 떠난다. 장명덕은 그곳에서 명중교회, 중추교회 등 3교회 전도사로 일하다가, 감리교 안시관 관장을 지내다 1990년 9월11일 노환으로 소천하였다.

이천국 목사 (1937~1939)

이천국 목사는 1894년 경기도에서 출생하였다. 1926년에 서울 협성신학교를 제 12회 졸업한 후, 1928년에 준회원에 허입하고, 1930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첫 목회지는 부천 부평(1930-1931)이며, 그 후 화도 덕적(1929-1930), 화도 영종(1930-1931)을 거쳐 논산(1931-1937)에서 목회하였다. 이때의 논산구역은 9교회로써 공주지방에서는 제일 큰 구역이었다. 이천국 목사가 부임한 이래 교세는 날로 부흥되어 가서 1933년에 와서는 사애리시(Rev. Robert A. Sharp, 1872-1906)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 아름다운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총경비는 2,755원 40전인데, 그 가운데 본 교회 적립금 750원과 사애리시 목사 부인이 400원, 안명도 감리사가 360원을 내어 지었는데 천연으로 된 돌들과 목재를 가지고 양회로 쌓아 견고하기도 하려니와 보기도 좋았다.

이렇게 성전을 짓고 난 다음 해인 1934년에는 9교회를 논산, 연산 양 구역으로 나누어 자신은 논산구역 5교회를 맡아 목회하다가 1937년 천곡교회로 부임하였다. 그때 천곡구역은 최용신 양이 돌아가면서 남겨놓은 학원사업과 그동안 근 18년간을 천곡교회를 위해 헌신 봉사해오던 협성신학 입학 동기인 김순봉 전도사의 만주로의 이주로 인한 어수선한 분위기, 그리고 일본인 오야마(大山)와의 미묘한 관계 등이 있는 어려운 시기에 약 3년간을 목회하였다. 그 후 그는 1939년에 천안으로 갔다가 1950년 소천하였다.

이기덕 목사 (1954~1968)

이기덕 목사는 1933년 11월 2일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지산리 817 번지에서 태어났다. 1961년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1974년 연세대학 연합신학원을 수료하였다. 그는 1961년에 목회를 시작하였고, 준회원 허입은 1962년, 목사안수는 1964년 그리고 정회원 허입은 1966년이었다. 그동안의 그의 목회 임지는 용인 중앙(1961-1963)으로부터 시작해서, 반월(1963-1967), 안산(1967-1968), 천곡(1968-1975), 안양제 1(1975-1977), 매원(1977-1981), 영화(1981-?)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그리고 목회하는 동안 교육부 총무(1967-1968), 전도부 총무(1970-1971), 수원 동지방 감리사(1973-1975), 수원 북지방 감리사(1976-1978), 수원지방 감리사(1981-1983)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기덕 목사의 천곡교회 부임은 천곡교회로서는 획기적인 인사였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지금 같으면 36,젊은 나이가 아니지만, 그동안 천곡교회는 35년 동안 두 분의 목사(전재풍, 이군석)가 장기목회를 하다가 은퇴를 했고, 이제 새로이 부임하는 목사는 전임자와 비교해서 너무 젊은 목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그의 조직적인 목회로 덮어지고 재임하는 기간, 즉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약 7년간에 걸쳐서 교회는 예산면에서 무려 10배의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1972년 3월에는 신축한 건물을 유지 재단에 편입하였으며, 1971년부터 상조회를 조직하고 1972년 10월에는 상여를 만들어 더욱 활발히 운영하였다. 먼저 언급한 바와 같이 부로지, 소반월에다 각각 교회를 살림내주고(1970), 배옷에서 집을 마련하고 교육관으로 사용하면서 장차 교회 개척의 기틀을 마련하며(1971), 재건학교라는 이름으로 학원운영에 전념하였다. 그는 부임한 이후부터사임할 때까지 주일엄수, 십일조, 성경다독, 쉬지 말고 기도, 전도 등의 표어를 반복해서 내세운 것을 보면, 그의 목회방향이 주로 신앙부흥에다 주안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서 교회부흥의 기초가 든든히 서게 되었다.

김진춘 (1968~1981)

김진춘 목사는 1941년 5월 2일 경기도 강화군 송해면 신당리 656번지에서, 아버지 김재부 씨와 어머니 황입분 여사 사이에서 6남매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찍이 강화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연합신학원을 졸업한 후 영란여자고동학교 교목(1970-1975)을 역임하였다. 1975년 천곡에 부임하여 1981년 매원으로 이임하기까지 7년간을 일하였다.

김 목사가 부임한 지 꼭 1년 후에 발표된 반월 신공업도시 건설계획은 교회로 하여금 대단히 뒤숭숭한 분위기가 되게 하였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토지나 집을 버리고 이주해야 한다는 아쉬움, 장래에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한 염려로 인해 교인들의 마음은 들뜨기 시작하였다. 김진춘 목사는 천곡에 부임한 이후 이임하기까지 6년간 계속 이런 문제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시대적인 요청인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임자가 신앙부흥을 위해 전력을 했다면 김 목사는 교회의 사외적인 사명을 강조하는 방향의 목회하였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1976년 9월 16일에 있은 교회창립 70주년 행사를 두고 볼 때, 그때는 아직 발표 직전인 것을 감안하면, 그의 본래의 목회이념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리고 그런 목회이념이 반월 신공업도시 건설 발표로 더욱 그런 방향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이제 그가 쌓은 업적을 보면, 그는 부임한 후 6개월 동안은 교회의 여러 가지 동태를 파악한 후, 자랑스러운 교회의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1976년 3월 28일 임원회에서 7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70주년 행사를 하였다.

백만국 목사 (1981~1987)

1981년 5월 10일 김진춘 목사가 사임하고 백만국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그의 약력을 보면 1925년 4월 27일에 평안북도 영변군 봉산면 윤흥리 74번지에서 아버지 백시도, 어머니 이정자 여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43년 평양 요한학교 본과를 졸업한 후, 1949년 평양 성화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1955년 단국대학 법정학부 법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962년 미국 뉴욕 육군 군목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동안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1948. 평안북도 순천지방 부암교회 담임
1949. 황해도 사리원지방 신악교회 담임
1951. 제주도에서 전도사 시무중 준회원 허입
1952. 충남 서산지방 안면도교회 담임
1953. 대전연회에서 목사안수 받음
1967. 육군 군목으로 15년간 근무하고 중령으로 제대한 후 철원지방 운천교회 담임, 포천경찰서 경목
1971. 서울대학병원 원목
1975. 이천지방 궁평교회 담임
1981. 반월지방 천곡교회 담임, 반월 출장소 정책자문위원

기수철 목사 (1987~2009)
진광호 목사 (2009~현재)
감리교 신학대학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
충청연회 온양 동지방 신인교회 담임전도사/담임목사
서울연회 성동지방 성민교회 교육담당 부목사/선교 담당 부목사
현)경기연회 안산 남지방 샘골교회 담임목사

※ 이 글은 주로 홍석창 목사님의 저서 <상록수 농촌 사랑>, <수원지방의 발자취 - 수원지방 70년 역사>와 목사님의 미공개 논문 등을 저자와의 동의 하에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