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감리교역사

한국의 개신교의 첫 전래

1885년 4월 5일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인천 제물포를 통해 입국함으로써
한국에 개신교가 공식적 경로를 통해 들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복음의 전래

1885년 4월 5일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인천 제물포를 통해 입국함으로써 한국에 개신교가 공식적 경로를 통해 들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 교회는 이를 개신교의 첫 전래로 보고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행사도 이를 기준으로 하여 지난 1995년에 열린 바 있다.

그러나 한편, 1885년을 선교 시점으로 잡는데 이견을 갖는 교회 사학자들도 있으니, 그것은 이미 1832년 독일인 칼 귀츨라프 목사의 방한이라든지, 1866년 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들어와 순교한 토마스 목사, 1884년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 등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드 암허스트호의 선의이며 통역관이었던 귀츨라프는 지금의 충남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 2리 고대도에 와서 성서를 전달했다고 한다. 그의 항해기에 따르면, 그는 조선 국왕에게도 성서를 권유했고 왕은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고대도 주민들은 성서를 받아 들였으며 당시 귀츨라프는 고대도에 상당기간 체류하면서 주민들에게 감자 재배법을 가르쳐 주고 감기를 앓고 있는 노인에게 약도 지어 주었다. 또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이를 다시 한국인 양이가 조선말로 받아 적었다고도 한다.

토마스 목사(Rev. Robert J. Thomas)는 최초의 순교자이며 1866년의 유명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련하여 더욱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영국 런던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로 미국 상선인 셔먼호에 편승하여 평양 대동강에 상
륙하였다가 선교의 기회도 얻지 못한 채 2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자신을 참수하는 사람에게 성경을 전했고 그것을 받은 참수관 박춘관은 후에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시작된 한미간의 협상이 1882년의 한미 수호조약 체결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미국
각 교단의 선교사 파견이 시작되게 되었으니, 실로 순교는 헛되지 않고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는 말
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보게 된다.

또 성서의 우리말 번역도 한편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1882년 중국에서 로스 목사를 중심으로 매킨타
이어(John McIntyre),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이성하 등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각각 개별 낱권으로 번역해서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27권이 낱권, 또는 몇몇 낱권의 합본으로 출판되다가 1887년에는 우리말로 번역된 최초의
완역 신약이 나오게 된다. 로스 번역팀 외에 이수정의 낱권 번역도 괄목할 만한데, 최초의 한글성서 번역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수정(1842~1886)은 1882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일행 사절에 동행한 민영익의 개인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1883년 일본인 목사인 야스카와[安川]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인물이다.

그는〈현토한한신약성서 懸吐韓漢新約聖書-한문 성서에 한국식 토를 단 것임〉를 완성해 1884년 간행했고, 이어 〈한역성경 漢譯聖經>을 가지고 〈마르코의 복음서〉를 번역해 1885년 초에 간행했는데,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부임할 때 가지고 온 성경이 바로 이 이수정역 <마가복음서>이다. 로스역과 이수정역이 국외에서 이루어진 것에 반하여, 국내에서도 상설 성경 실행위원회 산하 성경번역자회에서 낱권 번역을 출판하기 시작하여 1900년에는 <신약전서> 완역본이 나왔으며, 구약은 1911년 39권 합본의 <구약전서>가 미국 성서공회를 통해 출판되어 나왔다.


감리교 초기선교

1882년의 한미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서양인의 입국과 여행이 가능하게 되자 여기저기서 선교에 대한 새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조약에는 미국 시민이 한국의 공개 항구에서 거주권, 교역권, 창고 신설권을 가지
도록 보장되었고 영사, 공사의 교환과 상호원조가 있을 뿐이지, 종교의 자유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인하여 미국은 초대 공사로 푸트를 한국에 보냈고 한국에서는 6월에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보냈다. 특사 일행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883년 9월 2일 이었다. 한국 최초의 방미 사절단이었던 민영
익 일행은 워싱턴으로 가는 도중 열차 안에서 미 감리회 볼티모어 연회 소속인 가우처(John F Goucher)목사를
만나게 되었는데,가우처 목사는 특히 민영익과 대화를 나누면서 한국에 대한 지식을 얻었고 한국 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1885년을 선교 시점으로 잡는데 이견을 갖는 교회 사학자들도 있으니, 그것은 이미 1832년 독일인
칼 귀츨라프 목사의 방한이라든지, 1866년 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들어와 순교한 토마스 목사, 1884년 입국한 의
료선교사 알렌 등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1883년 11월 6일 미국 감리회 총회 선교위원회(The General Missionary Committee)에 "만일 은둔국인 한국에 선교사업의 정책을 세울 수 있다면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은 영구히 확립될 것이다"라고 건의하면서 2천 달러를 한국선교기금으로 기부했다. 그러나 선교본부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음해 1884년 1월 당시 중국에서 25년 동안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일본에 주재하면서 선교관리자로 있던 맥클레이(R. S. Maclay)박사에게 한국에 직접 현지 답사하여 선교지 개척 가능성 여부를 타진해 보도록 하는 서한을 보낸다.

가우처 목사의 요청에 따라 1884년 6월 24일 내한한 맥클레이 선교사는, 친분이 있었던 김 옥균의 주선으로 고종황제에게 선교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했고 청원서를 올린 지 나흘째 되는 날 김옥균으로부터 고종황제께서 학교사업과 병원사업을 해도 좋다고 허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클레이 목사는 일본에 돌아오자 미 선교본부에 이 소식을 전하고 이에 미국 뉴욕 선교본부에서는 파송할 선교사로 교육사업을 위해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목사 내외를, 그리고 의료사업을 위해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의사 내외와 그의 모친인 스크랜튼 대부인을 선택하였다. 이렇듯 감리교의 선교 정책은 처음부터 교회중심적인 교인양성보다는 교육과 의료 사업을 통한 간접적인 선교활동이었다.

1885년 4월 5일 미국 북 장로회의 언더우드(H. G Underwood)목사와 함께 아펜젤러 목사 일행이 인천에 도착했다. 이 날은 부활주일이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이 땅의 억압과 구습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부활절 날에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미국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염원을 표현하였다.

‘정치적으로 이 나라는 아직 불안합니다. 서울에서 일하기에는 불안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들이 해결되고 약하고 무질서한 정부가 강해질 때까지 아침 해가 돋는 나라에서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많은 불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 날 죽음의 장벽을 깨뜨리는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굴레를 끊으시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Annual Report of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1885, p237)

이것은 제물포에서 4월 9일 기록된 아펜젤러의 첫 편지 기록이다. 정동에 정착한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튼 가족들은 우선 병원과 학교 사업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그 활동을 시작하였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스크랜튼 대부인은 이화학당을 각각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를 시작하였고, 스크랜튼은 시병원을 설립하여 의료활동을 통한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학교와 병원을 통한 선교 방법은 좋은 효과를 거두어 한국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그릇된 선입견을 해소시켰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헌신적 활동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어 1887년 10월 9일 벧엘교회(현재의 정동 제일교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이후 복음 선교는 인천, 평양, 해주, 원산, 수원, 공주, 원주, 강릉 등 지방으로 복음을 확산하게 되었다. 특히 1894년~95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교회는 그들의 도피 장소 역할을 하여 많은 교인들이 생겨났다.

남 감리회의 경우는 개화파 지식인 윤 치호가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그 곳 남 감리회 선교부가 운영하던 중서서원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어 1887년 세례를 받았다. 그로 인해 최초의 남 감리교인이 되었다. 그 후 미국에 유학하여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1895년 2월에 귀국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에 모은 2백 달러를 한국 선교비로 써 달라는 부탁까지 할 정도로 열성이 대단했다. 귀국 후 의정부 참의, 외무 협판 등의 직책으로 정부 관리직을 맡아 보면서도 선교에 주력했다. 윤 치호의 요청에 응답하여 남 감리회는 1895년 10월 중국에 있던 핸드릭스 감독과 리드 목사를 한국에 보내 선교 가능성을 탐색케 하였다.

1896년 5월, 리드를 한국 선교사로 서울에 파송해 남 감리회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김 주현, 김 흥순의 활동으로 1897년 5월2일 경기도 고양읍, 6월17일 서울 광화문에 남 감리회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미국 남, 북 감리회는 비록 둘로 나뉘어 다른 통로를 통해 한국 선교를 개척하고 추진했지만 서로 협력하였다.

1906년 9월 남북 감리교회에서 교회명칭을 ‘감리교회’라 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익년 6월에 남 감리교 선교사와 미 감리교 선교사가 서울에 모여 남북 감리회가 협동하여 한국에 신학회를 조직하였으니 이것이 현재의 감리교 신학대학이다. 1927년 9월10일 남 감리교 한국선교 30주년 축하식을 거행하는 한편 남북 감리교가 연합할 것을 미국총회에 청원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에 와서 각각으로 선교하며 연회를 조직하였던 북 감리회 한국연회와 남 감리회 한국연회에서는 미국교회 총회의 승인 하에 1930년 11월18일부터 협성여자 신학교에서 남북 감리회 통합에 따른 조선 감리교 헌법과 규칙을 기초한 후, 동년 12월 2일 협성여자신학교 강당(현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조선 감리회 제 1회 총회가 개최되었고 한국에 있는 남북 감리교회를 통합시켜 한국이 자치하는 단일 감리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미국 남북 두 교회에서 선택된 20명, 한국 남북 두 교회에서 선택된 20명 등 도합 40명의 전국위원과 한국인 60명으로 구성된 본 총회에서 한국교회 실정에 부합된 ‘교리와 장정’을 제정하고 한국인 감독(당시는 총리사) 양주삼 목사를 선택하여 명실상부한 한국인의 자치교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시작이 되었다.
당시 한국 자치교회 창립의 주역을 맡았던 미국교회 웰치 감독은,

1. 조선 감리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2. 조선 감리교회는 한국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3. 조선 감리교회는 자치, 자주, 자립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고 강조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미국에서 파견된 선교사라 해도 한국 감독의 관리를 받아야 할 정도로 주체성을 소유한 교회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자치시대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 총회 이후 한국 감리교회는 ‘자치교회 시대’를 열었다. 한국 감리교회는 그 설립 취지로 위와 같이,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조선적 교회’의 3대 원칙을 선포하였으며 신앙 및 신학 원리로 8개조“교리적 선언”과 16개조“사회신경”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모든 의회 구성을 평신도와 성직자 동수로 하여 평신도의 역할을 증대시켰으며, 여성 성직의 문호를 개방하여 1931년 연합연회에서 한국 최초로 여선교사 14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0년대 한국교회가 점차 신앙적 영성과 사회적 지도력을 상실해 가고 있을 때, 이용도 목사는 부흥회를 통해 영적 각성과 교회의 갱신을 촉구하였으며, 그의 신앙과 삶은 큰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영성 회복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또한 1930년대 한국 교회가 진보·보수 신학 사이에 첨예한 갈등을 겪는 중, 웨슬리 복음주의 전통에서 진보적 신학을 수용하였던 정경옥 목사는‘신앙에서는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자유주의’ 입장을 취하면서 ‘신학의 현대화’와 ‘신학의 향토화’를 추구했고, 경건적 신앙 실천을 바탕으로 성서의 절대 권위를 강조했던 변홍규 목사는 보수적 신학 전통을 계승하며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일제 말기 교회는‘큰 수난에 처하여 신사참배’를 비롯한 일본의 국가 종교의식을 강요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고, 점차 강력해지는 일제의 억압 하에 한국 감리교회는 1943년‘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되었다가 1945년 7월 말‘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흡수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앙양심과 민족의식에 투철한 신앙인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쟁하였다.
예산제일교회 청년·학생들이 ‘학생속회’를 통해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어 투옥되었고, 모곡교회의 민족운동가 남궁억 전도사에게 영향을 받은 홍천과 춘천 지방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십자가당’을 만들어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투옥되었다. 그리고 동부연회의 철원읍교회 강종근 목사, 회양읍교회 권원호 전도사,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 등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쟁하다가 옥중 순교하였다.

그러던 중 1945년 8·15해방의 기쁨은 잠시, 남북이 분단되면서 38선 이북에 있던 교인들은 공산주의 정권의 수립과 함께 극심한 수난을 받게 된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공산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철원에서는 장흥교회 청년들이 애국청년단을 조직하여 반공투쟁을 벌이다가 투옥되었다. 결국 북한에 있던 많은 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고, 이후 북한 교회는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많은 예배당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쟁을 겪은 후 남과 북 사이에 정치·문화·종교적 갈등과 대립 구조는 더욱 심화되었고 이러한 민족의 분단상황에서 교회는 내적 갈등과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다.한국 감리교회도 해방 직후 재건파·복흥파 분열을 시작으로 1954년, 1970년, 1974년에 각각 교회 분열의 아픔을 겪었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합동함으로‘하나된 감리교회’전통을 이어 나갔다.

전쟁 후 감리교회는 미연합감리회 선교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재건과 복구 작업을 신속하게 전개하였다. 1964년 김활란, 홍현설의 발의로 시작된 민족복음화운동은 초교파적 대중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고, 1974년 시작된 ‘5천 교회 1백만 신도운동’과 1987년 시작된 ‘7천 교회 2백만 신도운동’은 교회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해방 당시 5만 명 수준이던 교세가 1984년에 90만 명, 1996년 현재 7개 연회, 국외선교연회, 서부연회, 183개 지방, 4,700교회, 135만 명 교인을 넘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 성장을 이룩한 한국 교회는 해외 선교를 통한 세계복음화에 적극 참여하였다. 1958년 볼리비아 선교를 시작하였고, 1965년 ‘감리교 선교 80주년 기념사업’으로 사라왁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 태평양 동아시아 지역, 1980년대 동남아시아 중동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 그리고 1990년대 러시아와 동유럽, 중국 등 옛 공산권 지역으로 선교가 확산되었다.

감리교 선교110년

한국 감리교회는 ‘선교 1백주년’을 맞아 1984년 6월 24일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 연합예배’를 개최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신앙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985년 4월 5일에 개최된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대회’에서는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대회 선언문”을 채택하여 선교 1세기를 정리하고 선교 2세기를 전망하는 신앙과 신학적 결의를 밝혔다.

그리고 1990년 10월 29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 6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 60주년 선언문”을 통해 한국 감리교인들은,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는 교회와 민족 앞에서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의 참된 평화를 위하여 우리의 선교적 사명을 마음 속에 되새기면서’ ‘새로운 각성과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것’을 다짐하였다.

한국 감리교회는 한 세기 역사를 통해
1) 성서 전통 이성 체험을 바탕으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웨슬리 복음주의 신앙 전통
2) 한말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족이 처한 사회·국가적 상황과 현실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의 구원을 구현하는 민족주의 신앙 전통
3) 기독교 복음을 한민족의 역사·문화적 전통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해석하는 토착적 신학전통
4) ‘하나의 복음’,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 일치운동 정신에 입각하여 다른 교파 교회와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신앙 전통을 수립하였다.

감리교 교세현황 (2007년 연회자료)
연회
/구분
서울 서울남 중부 경기 중앙 동부 충북 남부 충청 삼남 미주
선교
합계
지방수 13 15 29 25 20 24 13 20 21 21 13 214
교회수 354 385 909 670 535 618 363 515 577 581 318 5,825
입교인 118,812 83,054 152,878 72,277 50,311 58,583 26,391 54,924 53,727 34,955 13,112 719,024
세례인 28,173 10,375 23,985 11,346 7,447 7,720 3,646 8,195 7,154 8,702 2,312 120,055
세례아동 18,370 10,080 20,570 11,306 6,162 7,739 3,654 6,688 6,162 5,831 2,180 98,742
원입인
(성인)
47,768 94,078 118,618 20,454 21,968 25,264 11,515 23,087 16,649 11,446 2,093 392,940
원입인
(아동)
38,256 18,327 38,964 19,530 15,507 15,595 1,422 15,605 17,583 13,545 1,503 196,837
교인수 252,379 215,914 355,015 134,913 101,395 114,901 46,628 109,499 101,725 74,479 21,200 1,527,598
정회원 602 623 1,248 715 542 639 334 579 602 547 320 6,745
준회원 98 74 133 89 66 63 34 69 52 71 31 780
담임서리 5 9 18 19 11 19 23 20 12 30 9 175
수련서리
(기관포함)
26 33 36 19 16 4 4 20 10 4 9 181
협동회원 2 1 5 0 0 1 1 1 0 0 0 11
원로목사 122 76 125 69 39 61 25 56 70 41 22 706
국외거주 78 19 18 43 83 35 10 30 8 8   332
교역자수 933 835 1,583 954 757 822 431 775 754 695 391 8,930